/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미당 서정주 시인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 문득 떠오르는 계절이다.
정읍은 10월엔 청초한 구절초, 11월엔 붉은 단풍이 피어난다.
이 푸르른 가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한국 근·현대 미술 중 의미 있는 작품과 보고 싶은 화가들을 정읍시립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오지호의 <남향집>에서 <처의 상(像)>을 만나 진환의 <천도와 아이들>을 따먹고 놀아보자. 장욱진의 <마을>에 있는 김환기의 <초가집>을 지나 이중섭과 함께 <정릉풍경> 속을 천천히 산책하며 걸어보자.

6.25 한국전쟁 때 전주에 내려와 살다가 남고산성 자락에 묻힌 묵로 이용우 선생의 <춘경산수>와 함께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이당 김은호, 의제 허백련을 병풍으로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고창 무장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서양화 교수를 지낸 진환 선생의 <길과 아이들>, <소>, <연기와 소>, <천도와 아이들> 4점의 그림을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은 기회이다.

어렸을 때 군산에서 자란 우향 박래현, 한국 수묵화 운동의 기수였던 전주의 남천 송수남, 정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윤명노. 20대 청년시절 전주에서 죽사(竹史)라는 호를 쓰며 그림을 그렸던 이응노의 <군상>을 접할 수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를 등 뒤에 놓고 팔을 뒤로 하고 그린 군산대에 있었던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 76-1(뒤에서)>을, 전주대 교수를 했던 임옥상의 <거리-해바라기>와 황재형의 <황지330>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과 삶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한다.

올해 105세 노작가 김병기는 102세인 2018년 <산·동쪽>을 그렸다. 1916년생 평양종로국민학교 동창 이중섭은 40세에 돌아가셨는데, 김병기 선생은 100세가 넘어 지금도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이다.

이우환의 <점으로 부터>, 박서보의 <유전질 1-68>, 윤형근의 <청다색>, 물방울 작가 김창열의 1978년 <물방울>을 비롯 한국의 단색화 대표작품을 만날 수 있다. 또한 1980년의 <소시장 이야기>를 본 80세 화가 황영성은 자기 작품을 40년만에 처음 다시 본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백남준의 1969년 비디오 작품을 비롯, 김구림의 <정물>, 이강소의 <아담과 이브 이후> 등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평소 접하기 어려운 한국미술의 의미있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날. 그리운 화가들의 작품을 정읍에서 직접 만나보는 건, 코로나 19를 이겨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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