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국민연금공단)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고마움을 잊을 때가 있다. 고마움은 쉽게 잊어버리고 도움을 주었던 것은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나 역시 지난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잊고 지냈다. 어제 우연한 기회를 가지기 전까지는.

어제 저녁이었다. 퇴근 후 지하철을 내려 약속 장소로 가는데 역 대기실 벤치 아래 검은 물체가 보였다. 검정색 카드지갑이었다. 지갑을 들고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분실한 것이 분명했다. 카드 8개와 오만원권, 만원권 지폐가 제법 있었다. 지갑 주인은 현금보다 카드 때문에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지갑을 뒤져 연락처를 찾았지만 없었다. 난감했다. 그렇다고 제자리에 둘 수는 없었다. 지하철 역무원에게 습득 사실을 이야기하고 건내주니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괜찮다고 하자 전달하면 연락을 준다는 것이다. 연락처를 적어주고 지하철을 나오는데 지난해 기억이 떠올랐다.

국회에 다녀오면서 수서역 대기실에 지갑을 두고 열차를 탔다. 지갑이 없어진 사실을 익산역에 도착할 무렵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고서야 알았다. 역무원이 혹시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놀라 가방을 뒤지니 지갑이 없었다. 내 지갑에는 오늘 지갑을 분실한 그분처럼 카드와 약간의 현금 그리고 명함이 있었다. 

역무원은 수서역에 보관하겠다며 찾아가라고 했다. 당시 생각은 다른 직원이 서울 출장 가는 길에 찾아오라고 부탁하려 했다. 지갑을 잃어버린 지 며칠이 지나도 부서 직원들이 서울 출장갈 일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서역에 전화해서 전주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는데 익산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해 주겠다며 내일 찾을 수 있도록 보내주겠단다. 다음날 오전에 나는 익산역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받았다. 현금과 카드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나는 역무원에게는 인사는 했지만, 정작 내 지갑을 찾아준 분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연락처조차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내게 마음의 빚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1시간 지났을까. 지하철 역무원에게 전화가 왔다.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하며 주인이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답례를 하겠다고 하여 사양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지갑 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계좌번호를 달라는 문자였다. 지갑을 전달한 것이 답례가 필요할까. 내가 한 일은 지갑을 몇십 미터 공간 이동시킨 것뿐인데. 기분 좋은 오늘이라 생각하라며 문자로 답장을 하고 그냥 넘겼다. 

오늘 아침이었다. 카톡이 왔다. 낯선 사람이 커피 2잔과 작은 케익을 보냈다는 문자였다. 잠시 당황했지만, 어제 지갑을 분실한 분임을 알았다. 돌려보내려다 성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먹겠다는 문자와 함께 그분의 주소를 받아 지난해 발간한 내 수필집을 보내드렸다. 

잠시 지난해 내가 지갑을 분실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내 지갑을 누가 주웠을까. 나는 왜 내 지갑을 돌려준 분에게 고맙다는 전화 한 통 하지 못하였을까. 어제 몇십만 원의 현금과 카드가 든 지갑을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1년 전 내가 마음의 빚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어제 지갑을 돌려줄 기회를 준 그분께 도리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우울한 일이 한두 차례 있었는데 마음의 빚을 조금 갚았다는 기분에서인지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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