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누님 손 뿌리치고 나온 걸 후회하셨던 어머니 한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3살 나이로 황해도 은율에서부터 피난을 온 김덕화 할아버지의 말이다. 김 할아버지는 피난에 나서던 날 새벽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새벽, 김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거기 있으면 안 된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피난 짐을 챙겼다. 세 아이를 다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아직 제대로 못 뛰는 막내(김덕화 할아버지)만 어머니가 간신히 들쳐 업은 채였다. 조용히 싸리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둘째 누이가 잡았더랬다. “같이 가요, 어머니” 하며 붙들어오는 고사리같은 손을 뿌리치고 세 사람은 피난길에 올랐다. ‘너희는 말귀를 알아들으니 할머니 할아버지 잘 모시고 있어라. 꼭 돌아온다’고 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날 딸들을 미처 데려오지 못한 일은 어머니의 가슴에 피멍으로 남았다. ‘나도 데려가, 나도 데려가’따라올 때 데려올 걸, 그 손을 뿌리치지 말 걸, 수없이 되뇌던 어머니는 결국 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0여 년 전 돌아가셨다.

김 할아버지는 “눈감기 전 당시 잃은 김경애, 김순애 두 누님을 꼭 만나고 싶다”며 “다른 사람들이 고향 가족과 다 만나는 명절이 되면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고 말하는 한편, “어떤 형태로라도 보고싶고, 여기 내려와 같이 살자고 한 번 말해보고싶다”며 “아프지만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생 할아버지는 평안북도에 있는 박천에서 피난을 왔다. 당시 북한군 훈련소가 있던 박천에 미군의 폭격이 이뤄지며 집 지붕이 파편에 맞아 뚫리자, 이에 위기감을 느끼면서다. 청천강을 지나 있는 안주에 외갓집도 있고 고모집도 있으니 거기 가 있다 오자, 는 부모님을 따라 간 이 할아버지는 이후 고향 집을 볼 수 없었다.

‘집을 지키고 있겠다’며 홀로 남으신 할머니 안부를 확인하고 오겠다던 부모님이 아침부터 안주를 떠난 날, ‘이곳이 전쟁터가 되니 10리 밖에 나가 기다리다 돌아오라’는 마을 반장의 말을 따라 나선 바람에 가족들이 종내에는 뿔뿔이 흩어지면서다. 10리 밖으로, 10리 밖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긴 이 할아버지는 남으로, 남으로 오다 영등포에서 화물차 연탄 위에 자리잡고 내려왔다.

이 할아버지는 “지금도 휴전선 인근에는 ‘통일이 되면 빨리 올라간다’며 살고 있는 이들도 많아 안타까울 뿐”이라며 “이북과 연락이 잘 되어 북에 계신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이날 전북지역에서 첫 선을 보인 이산가족 화상상봉장 시범운영을 위해 모였다. 전북의 경우 전주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 2층에 설치된 화산상봉장은 이산가족 1세대들이 나이가 들어가고,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상황 등을 감안해 오래 가족을 그리워한 이들이 화상으로나마 서로를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서울사무소와 전주, 의정부, 홍성의 신규상봉장 3개소에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는 각 상봉장별로 이산가족을 초청해 위로한느 한편 화상 연결을 시연·화상을 통한 면담을 진행했다.

전북지역에는 현재 812명의 이산가족이 등록돼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 이선홍 회장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생존해계신 분들이 36%정도로, 고령화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며 “이산가족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도록 하루빨리 화상상봉이라도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김수현 기자·ryud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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