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에 살고 번성하다

<4. 임실 오수면과 의견>들불 속 사내 구하고 죽은 견공 그 무덤에 꽂아둔 지팡이 나무로 자라 ‘오수’ 명명 훗날 의견비 세워 충정 기려 전북 민속문화재 제1호 지정 최병호 기자l승인2021.09.15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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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야생동물 가운데 가장 먼저 가축화 됐다. 개는 사람에게 충실하고 의리가 있는 가축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가축을 넘어서 오랜기간 반려동물로 길러진 개들은 속담 속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평소에 좋아하는 것을 마다할 때 '개가 똥을 마다한다'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가치있게 산다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그리고 흔하던 물건도 찾으면 귀하다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19세기 미극 언론인 찰스 대너가 밝힌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거리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함축적인 뉴스의 요건을 뜻하는 말이다. 이처럼 개는 우리네 생활과 밀접함을 유지해 왔다.

전북엔 개와 관련된 대표적인 고장이 있다. 바로 임실군 오수면이다. 임실은 예로부터 충·효·절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왔다. 그리고 오수는 개와 연관이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오수라는 지명은 1254년 고려시대 최자(1186~1260)가 지은 '보한집'에 수록된 '오수의견설화'에서 유래했다. 보한집은 무신집권기 최우의 권유로 1254년에 출간한 시화집이다. 이 시화집에는 거리에 떠도는 흥미로운 이야기, 부도와 부녀자들의 이야기를 실었다.최자의 이력 중 오수 의견관 관련, 충청도와 전라도 안찰사를 역임한 것이 주목된다. 즉 그가 전라도 안찰사로 이 일대를 방문했을때 오수의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신기하고 재밌다하여 채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수하면 '의견'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오수의견 설화가 초등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이다. 우선1911년에 간행된 보통학교 교과서'조선어독본 제18장 의구'와 1973년 국민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오수에 대한 지명유래가 전해진다.

지면을 통해 '조선어독본' 원문 그대로를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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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전북 남원군에 김개인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서, 개 한 마리를 길의되 심히 사랑하더라. 1일은 근동에 출입할 새, 그 개가 또한 따라왔드니, 개인은 귀로에 술이 대취하야 길가 풀밭에 누우니라. 그 때에 마침 들불이 일어나서 개인의 누은 곳까지 장차 태우게 된지라. 개는 그 주인이 취하여 잠든 사이에 타 죽을까 우려하야 내를 찾아가서 몸에 물을 적셔다가 주인의 주위로 돌아당기면서 풀에 물을 축여서 타는 것을 방지하여주인의 생명을 구한 후에는 기력이 탕진하여 죽으니라. 개인이 잠을 깨어 개의 자취를 살펴보니 실로 비참한지라. 이에 노래를 지어 개연한 뜻을 표하고 그 개의 시체를매장하아 분묘를 만든 후에 집팽이를 묘 앞에 꽂아서 표를 하얏드니, 그 집팽이가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된지라. 이로 그 지명을 오수라 하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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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고려 시대 때 거령현에 살던 김개인이란 사람이 충직하고 총명한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동네 잔치에 다녀온 김개인이 술에 취해 풀밭에 잠들었을 때, 들불이 번져 김개인이 누운 곳 까지 불이 번져왔다고 한다. 김개인이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잠들어 있자 김개인이 기르던 개가 근처 개울에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불위에 뒹굴어 불을 끄려고 여러차례 반복한 끝에 개는 죽고 말았고 김개인은 살았다다.사태를 파악한 김개인은 몹시 슬퍼하며 개의 주검을 묻어주고 지팡이를 꼽았고 나중에 이 지팡이가 실제 나무로 자라났다고 한다. 그래서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를 합하여 이 고장의 이름을 오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이 개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의견비를 세운다. 비석은 높이 218cm, 폭 98cm, 두께 28cm정도의 규모이며 앞면과 뒷면에 무엇인가 새겨져 있어서 탁본을 해보니 비석 앞면에는수 많은 점으로 표현된 누워서 하늘 향해 앞발을 들어 올리고 있는 개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 형상이 인위적으로 만든 형상인지 자연석인지는 명확치 않다. 또한 뒷면에는 약 100자가 넘는 글자를 판독해 냈다. 그 결과 시주자, 대시주, 금물대시주 등 약 65명의 명단이 밝혀지게 된다.
사실 의견비가 제일 먼저 세워진 곳은 오수철교 아래 흐르던 냇가였다.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 전라선 철교공사를 하던 중  상리마을 모래에 묻혀있던 것을 발견해 1939년에 원동산으로 옮겨놓고 비각과 일주문을 세워 공원을 만들어 원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의견비 옆에는 의견 조각상이 자리해 있는데 오수 일대를 굽어보는 충견의 모습이 듬직해 보인다.
의견비는 이후 가치를 인정받아 1971년 전북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그렇다면 오수 의견설화의 주인공인 오수개는 어떤 개일까.
오수의견의 '오'는 '대형견'을 뜻한다. 이를 근거로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돼있는 '대형견'을 오수개의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사는 오수개의 원형에 대해  "사실 개는 '견'이라고도 부르고 '구'라고도 부르는데 당시 사람들은 개를 구분힐 때 '오'  '견'  '구'를 썼으며 특히 '오'는 영물스런 견종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때 사신을 통해 고려로 오게 되는데 김개인을 따르던 개도 외형적인 특징상 현재 흔히 말하는 '장오'즉 사자개일 확률이 높다"고 전한다
임실군에서는 오수개를 복원하고자 1999년부터 노력해 왔다. 당시 윤신근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 한홍율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이 참여한 '오수개 유전공학육종 연구위원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오수개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지금 오수의견동상이 이 개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의견비가 있는 원동산은 임실지역 항일운동의 터이기도 했다.
김철배 학예사는 "원동산은 조선시대 남원부에 속하는 오수역이 있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 3월 23일부터 오병용 선생을 주축으로 2000여명이 원동산에 모여 궐기한 후 장소를 주위 시장터로 옮긴 후 망루가 있던 주재소 습격까지 하게 된다."며  "실제 궐기 인원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과 남원 주민들에겐 상당히 소중한 유적지로 기억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수는 조선시대부터 임실의 중심지로 번생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명품 비단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지금도 오수 원동산 옆쪽엔 비단실을 만들던 오수 제사공장 굴뚝이 남아있다. 이처럼 경제활동이 커지며 자연스럽게 돈이 모여지고 이에 편승해 많은 일본인들이 오수로 이전해 온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순사 주재소 옆에 감시수단인 망루를 세우게 된다. 이 망루는 지금도 보존돼 있다.  해방 후에는 산불예방 감시용으로도 쓰였으며 한국전쟁때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막기위한 초소로, 또 빨치산을 경계하는 망대로도 쓰였다. 이후 시계가 흔치않던 1960년대에는 정오를 알리는 시계 역할을 했었다. 이 지역 농민들은 논밭일을 하다가 이 곳에서 울리는 소리에 점심때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후 유신독재 시절에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을 이 곳에서 울렸다고 한다.

또한 오수는 조선시대 오수역참이 있던 곳이다. 오수역을 중심으로 남원, 곡성, 구례, 광양 여수까지 아우르는 11개 역을 관할했으며 문관 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다. 1931년 전라선이 오수역을 지나면서 새로운 물류의 중심이 된다. 1752년 이후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용성지(남원군 읍지)'에  오수역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가 기술돼 있다. ''용성지'에 따르면  오수역에는 역마 27마리, 열리613명, 역노 120명, 역비 57명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오수 역참은 사라지고 수령 5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큰 은행나무가 역참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최병호 기자  cbh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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