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보림리 관동마을을 지나다 보면 고고한 기품이 느껴져 사뭇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남고서원이다. 남고서원은 일재 이항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그의 곧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세운 곳이다. 1685년(숙종 11) 가치를 인정받아 사액을 받게 되었다.

이항은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이자영(李自英)의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항지(恒之)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능하고 기세가 남달랐다. 넘치는 기세는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 분동마을에 박혀 있는 바위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바위에 얽힌 일화는 다음과 같다. 그의 아내는 매일 그를 마중 나갔는데 냇물에 치맛자락이 젖곤 했다. 이를 안쓰러워하던 그는 아내가 돌을 밟고 오도록 칠보산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집어 던져 징검다리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여느 위인들처럼 태어나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지는 않았지만 흉악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제압하는 인물이었다. 28세에 백부 이자견(李自堅)의 충고로 그간 자신의 행보를 뉘우친다. 몸에 베인 기운을 억누르고자 사방에 칼을 꽂아두고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이렇듯 남다른 의지를 가진 그는 송나라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 산에 들어가 수년을 독학했다. 이후 공부를 이어가다 40세가 되던 1538년(중종 33)에 어머니 최씨를 모시고 태인 북면으로 낙향한다. 이후 보림사에 서당을 짓고 현판에 한일(一) 자만을 써놓았는데 이것이 그가 일재(一齋)로 불리게 된 연유다.

그는 정읍에서 생활하며 점차 깨달음을 얻어 호남 유학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철학적 체계를 완성한다. 여기서 이는 만물의 본질적 존재, 즉 정신을 의미한다. 기는 만물의 현상적 존재로서 기운을 뜻한다.

이기론은 조선시대 들어 논의가 활발해진다. 김익두 전북대 교수는 “조선 성리학의 학파는 만물의 존재 근원을 기(氣)로 보는 율곡 이이의 주기론(主氣論)과 이(理)로 보는 퇴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으로 나뉜다”며 “일재 이항은 이와 기가 구체적인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항은 탁상이론을 배제하고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을 중시하였으며 제자들을 주도면밀히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이후 이름난 업적을 이뤄낸다. 서예가이기도 한 류승훈 남고학당 훈장은 “수제자인 김천일 장군의 건재(健齋)라는 호에는 일재 선생의 실천유학을 본받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팔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며 대의명분을 세웠다”고 전했다.

김천일이 나주에서 의병을 결성하는 데에 이항의 제자들이 힘썼으며 의병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정유재란에서도 그의 제자들은 의병을 일으켰고 나라를 지켜냈다. 그의 학문적 정신을 본받은 제자들이 호남의병의 근간을 만든 것이다. 그의 뿌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남고서원 옆에 남고학당을 건립했다. 남고학당에서는 자라나는 새싹선비들에게 바른 정신과 얼을 가르치고 있다.

남고서원 강수재(講修齋)에 걸린 주련(柱聯)에는 태산가가 쓰여있다. 안성렬 태산선비문화사료관 관장은 “태산가는 이항 선생이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인 「일재집」에도 실려 있다”며 “꾸준히 학문에 정진하면 목표로 하는 ‘태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誰云泰山高 태산이 높다 하되,
自是天下山 하늘 아래 뫼이로다.

登登復登登 오르고 또 오르면,
自可到上頭 못 오를 리 없건마는,

人旣不自登 사람이 아니 오르고,
每言泰山高 뫼만 높다 하더라.

무관을 꿈꿨지만 백부 이자견의 충고로 문인 중의 문인으로 살아가게 된 이항. 서른의 나이로 학문에 도전해 호남 유학의 비조(鼻祖)가 된 그는 태산가처럼 살다간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임다연·장소은 인턴기자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