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깡~깡"
전주 서완산동 용머리고개 대장간 안에서 굵은 땀방울과 함께 1000도가넘는 화로 앞에서 철 다듬이 소리가 난다.
연일 30도를 오르내린 올해 한 여름 무더위도 대장간 화로앞에선 그저 가을이다. 한켠에서 외롭게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한 대는 대장장이의 땀을 식히기엔 역부족이다.

대장장이란 철·구리·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기술자를 뜻한다. 딱쇠, 대정장이, 성냥, 바지, 야장, 철장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했다.
그들의 작업장인 대장간에는 풀무와 화로가 기본적인 설비이고, 그밖에 모루, 메, 망치, 집게 등의 연장이 있었다.
당시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풀무로 화로의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메질과 담금질을 계속한다. 그런 다음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 시우쇠(쇠를 불려서 만든 쇠붙이의 하나)를 토막내는데, 이를 “깜을 잡는다.”고 한다. 깜을 잡은 뒤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서 수메(슴베:손잡이 속에 들어간 부분)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다. 다음에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 자루를 박는다.
전통적인 대장장이가 호미 하나를 만드는 시간은 줄잡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기계로 제작하면 한꺼번에 수십 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대장장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시골의 장에서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용머리고개에는 유독 대장간과 골동품점들이 모여있었다. 언제부터 용머리 고개에 이런 가게들이 모여있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용머리고개가 행정구역상 속해있는 완산동 토박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고개가 김제와 부안으로 나가는 길목이어서 대장간이 있었을 거라고 전해졌다고 한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대장간 중에는 '광명대장간'이 가장 오래된 곳으로 1956년에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전주미래유산 37'로도 지정돼 있는 광명 대장간은 현대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전통기술 방식으로 주문 들어온 제품과 농기구 등을 제작하고 있다.1대 창업자의 뒤를 이어 현재 대물림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가게 한쪽에는 '방하착'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흔히 스님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로서 '내려놓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창업주와 현 사장님의 마음을 다지는 좌우명이란다.
"기술을 전수하고자 하는 후계자는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요즘 이 힘든 일을 누가 하려하겠어요" 라며 다시 망치질에 몰두한다.
예년 이때쯤이면 가을 캠핑을 가기 위해 고기구이용 그릴 제작 주문이 많이 들어왔지만 작년부턴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이 마저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금 주 업무는 고장난 농기계 수리라고 말한다.

-용머리고개 위치와 지명 어원
전주 서완산동 용머리고개는 현재 지형적으로는 완산의 산자락과 다가산이 이어지는 산마루이다. 이 곳은 전주부성의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완산교를 지나 김제 금구로 나가는 길목이다. 용머리라는 명칭은 이름 그대로 지형적 유사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다가산과 유연대 자락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이 곳이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모악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용의 형태를 하고 있는 완산칠봉 중 이 곳이 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고려기대부터 용머리고개는 현재 효자동과 삼천동 일대를 지나 정읍-김제-부안 곡창지대를 향하는 교통로의 시작점으로 많은 곡류 뿐만 아니라 각종 물품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굶주린 민초들로 구성된 도적떼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완산동 용머리로 부분이 용의 머리인데 전주의 정기를 잘라내야 한다며 일본인들이   도로를 개설하면서 용의 머리를 끊어 버렸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전주의 혈을 끊었다"며 매우 안타까워 했다.
그러던중 2000년대 초반 김완주 시장 재직시 오목대부터 한옥마을을 거쳐 이 곳을 통과하는 구름다리를 개설하려 했으나 예산 문제로 중단됐다.

-용머리고개 명칭 설화
또한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장군 강감찬에 관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감찬 장군이 이 지역을 지나칠 때 이 곳은 몹시 가물어 백성들이 물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강 장군이 하인을 불러 "지금 막 내를 건너는 초립을 쓴 동자가 있을 터이니  이리 데리고 오너라"고 지시하고 하인이 그 초립동을 데료오자 강감찬이 "이렇게 가물었는데도 못 본 체 하고 지나가다니 매우 괘씸하다"고 꾸짖으며 "당장 비를 내리게 하지 않으면 머리를 자르겠다"하니 초립동으로 둔갑한 용이 죽음을 면하고자 승천하며 비를 내리게 하고 떨어져 죽은 곳이 바로 이 고개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허황된 이야기지만 어떻든 이 곳은 용의 기운이 서린 땅이며  그 상징성은 보존가치로도 충분하다.

용머리고개 옆에는 전주의 신령이 깃들어있다는 '완산칠봉'이라는 영산이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그의 저서 '남행월일기'를 통해 "완산이 참으로 작은 산에 불과한데 이 고을 이름을 '완산'으로 삼음이 참 묘하다"고 했다. 완산은 기러기 형국의 산형으로 외칠봉, 내칠봉, 좌우칠봉'으로 구분돼 삼면칠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완산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뿌리'로 인식되어 땔나무를 채취하는 행위를 금했다. 완산은 영기가 깃든 산으로 송장을 거꾸로 묻어도 아무 해가 없을 정도로  명당이라 전해진다. 그래서 예전에는 소나무가 많았으나 이후 사람들의 벌목으로 민둥산이 됐다가 일제 강점기때 삼나무를 많이 심었다.
특히 완산칠봉 투구봉은 산 꼭대기에 많은 철이 숨겨져 있어 자주 벼락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유유히 흐르는 전주천의 맑은 물과 투구봉에서 캐온 철들로 인해 용머리 고개에 대장간이 밀집됐을 것이란 추론이 생기는 대목 이다.
또한 1950년 초 용어리고개를 지나 외곽으로 가면 일명 변두리 논이 많았다고 한다. 그 논에서 수확한 후 쌀들이 주로 용머리고개를 지나 전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로인해 변두리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농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고개에 대장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최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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