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한혜는 세종 11년 8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4월 이임하였다. 그는 최연소 전라감사로 27살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젊은 나이에 일찍이 출세길에 오른 것은 그의 아버지 개국공신 영의정 한상경의 후광과 15살에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출중한 역량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등과자 한혜는 29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초의 대표적인 명문거족
한혜(韓惠, 1403~1431)의 본관은 청주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그의 아버지가 헌상경(韓尙敬)으로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건국후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어 태종대에 영의정에 올랐다. 한상경은 글씨도 잘 썼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제학을 지낸 한수(韓修)이고, 증조부는 밀직부사에 올라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진 한공의(韓公義)이다.
그의 처부는 이수(李穗)와 성달생이다. 성달생은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로 태종 17년 전라감사를 지냈다. 장인과 사위가 전라감사를 역임한 것이다. 전라감사 명부를 보면 그의 14대손 한진창이 또 1905년에 전라감사를 지냈다. 그의 증조부 한공의는 좌천되어 전주목사를 지낸 적이 있다. 이래저래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다.
청주한씨는 조선초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이다. 한확의 딸은 세조의 장자인 덕종의 비이며, 한명회의 두 딸은 예종과 성종의 비이고, 한백윤의 딸은 예종의 왕후이다. 한상경이 개국공신에 책봉된 이후 한명회를 비롯한 다수의 청주한씨들이 단종ㆍ세조ㆍ성종대에 걸쳐 정난ㆍ좌익ㆍ적개ㆍ익대ㆍ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다. 청주한씨는 가문에 힘입어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오른 자들이 많았다. 한혜도 문과 급제 이전에 종묘서령을 지내고 있었다.

▶15세, 최연소 문과 장원급제자
한혜는 태종 14년(1414) 12살 때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태종 17년 15살 때에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 정도면 신동이다.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그것도 1등으로 장원급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의 할아버지 한수도 장원은 아니지만 15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 3대가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 문과급제자 수는 14,620명인데, 문과 급제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이고, 연평균으로 나누어 보면 1년에 29명 정도 급제한 것이 된다. 이렇게 어려운 시험이 문과 대과이다. 그런데 3대가 문과에 급제하였고, 한혜는 15살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최연소 문과 급제자는 이몽필로 중종 때 13살에 급제하였고, 대문장가 이건창은 고종 때 14살에 급제하였다. 한편 최고령 문과급제자 김재봉은 철종대에, 박화규는 고종대에 각각 90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한혜는 조선시대 최연소 문과 장원급제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종합인물시스템’에 최연소 장원급제자로 선조대 17살에 1등으로 급제한 박호를 들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혜는 이보다 빠른 15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급제 석차에 따라 임용되는 직급이 달랐다. 장원급제하면 바로 참상관 종6품이 주어지고, 갑과 2,3등은 정7품에, 을과는 정8품에, 병과는 정9품이 주어졌다. 같이 급제하였어도 장원급제와 병과 급제는 관품이 5단계나 차이가 난다.

 ▶27세, 최연소 전라감사
한혜는 장원급제한지 3년만인 세종 2년(1420)에 18살의 나이로 동부대언(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승지는 국왕의 비서로, 한혜는 18살에 국왕의 최측근이 된 것이다. 이후 우부대언을 거쳐 세종 5년 좌대언에 임용되었다. 좌대언은 승정원의 6승지 중에서 비서실장격인 도승지 바로 아래 자리이다. 이해 그의 아버지 한상경이 졸하였다.
한혜는 세종 8년 24살 때에 병조 참의가 되었다. 병조 참의는 정3품 당상관으로 지금의 국방부 차관보에 해당한다. 세종 10년에는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좌군동지총제에 임용되었다. 동년 11월에 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세종 11년 4월에 돌아와 8월 19일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전라감사에 부임할 때 한혜의 나이는 27살로 조선시대 467명의 전라감사 중에서 최연소이다. 그는 이듬해 세종 12년 3월 26일에 전라감사직에서 파직되었다. 그 사유는 광주사람 노흥준이 광주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노흥준이 관기 소매를 기첩으로 삼았는데 목사 신보안이 소매와 간통하자 목사를 발로 걷어차고 욕설을 하는 등 욕보였다.
이 일로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 전라감사 한혜는 이를 제대로 조사하여 밝히지 못하였다고 형조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처음에는 장 70대에 처해졌다가 감해져 파직만 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후임 전라감사 신계가 4월 9일에 도임한 것으로 보아 한혜는 이날 교귀식(인수인계식)을 하고 전라감사직에서 이임한 것으로 보인다. 일도를 책임지는 감사는 파직되어도 신임감사가 부임해 대면하여 도정을 인수인계할 때까지 감사직을 수행하였다. 한혜는 8개월 정도 전라감사로 재임하였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
파직된 세종 12년, 그해 12월에 한혜는 함길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에 제수되었다. 조선시대의 파직은 영구히 벼슬에 못 나가는 것이 아니다. 파직되었어도 다시 벼슬에 나갈 수 있었다.
세종 13년 함길도감사 재임시 세종이 "감사 한혜는 성질이 본래 느려서 아마도 진휼을 제때에 해낼 것 같지 않다."고 하자, 황보인이 아뢰기를 "한혜는 조심성 있고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조심하는 것이 비록 좋긴 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혹 잘못이 있을 수 있으니, 전심해서 기민을 구제하라는 뜻으로 유시하라."고 하였다.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혜는 세종 13년 3월 함길감사 재임시 2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세종실록』 그의 졸기에, “함길도 도관찰사 한혜가 졸하니, 중관(中官)을 보내어 조문하였다.”라고 딱 한 줄 나온다. 그는 출중한 가문과 뛰어난 역량으로 일찍 출세길에 오른 소년등과자이다. 그런데 너무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혜의 아들은 영중추부사 한계미(韓繼美),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청평군(淸平君) 한계순(韓繼純) 등이다. 한계미는 문음으로 벼슬에 나와 좌익ㆍ적개ㆍ좌리 공신에 연이어 책봉되었으며, 그의 처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언니이다. 한계희는 문과에 급제하고 익대ㆍ좌리 공신에 봉해졌다. 한수-한상경-한혜-한계희 4대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한계순은 문음으로 벼슬에 나와 익대ㆍ좌리 공신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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