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27주년을 기념할만한 공연이었다. 2년 전 사성구(대본), 한승석(작창)과 함께 소리극 ‘정읍사는 착한여인’를 성공시켰던 주호종 연출의 선택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정읍시립국악단 창작 소리극 ‘갑오년 만석씨’가 9일 저녁 7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펼쳐졌다.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 의미가 무거운 만큼이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무대화됐던 소재다. 자칫하면 어디서 들은 듯한 줄거리와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을 되풀이 하는 것 같다는 오해를 사기도 십상이다.  

하지만 ‘갑오년 만석씨’는 치열한 역사의식이 담긴 대본과 한 발 앞서는 무대 미장센은 이런 우려를 허용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백정 ‘만석’이다. 그는 사랑하는 달래와 결혼을 위해 고부군수의 지시대로 만석보를 만드는데 앞장 서지만 결국 버림을 받는다. 동학군에 붙잡힌 만석을 ‘사람이 곧 하늘’이라며 전봉준이 구해주고 그는 동학군의 선봉에 선다. 우금치에서 패한 뒤 죽임을 당한 전봉준 장군의 신체 일부를 수습하고 이내 그도 목숨을 잃는다.

작품은 무명의 동학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당시 양반을 중심으로 한 선비들의 위선과 비겁함을 꼬집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대로 민중위에 군림한 친일파와 지금도 그 피를 이어받은 듯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 지도층으로 남아 있음을 상기시킨다.

무대도 장면의 집중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주역은 LED. 2년 전 ‘정읍사는 착한여인’에서 일부 LED 조명을 사용했던 주호종 연출은 이번 공연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열의 감정은 물론이고 전투의 긴박감과 비장함을 효율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출연자들의 연기도 안정적이었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소리꾼 정보권은 천한 백정과 사랑에 빠진 청년, 그리고 동학군 선봉까지 변화하는 만석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또한 만석의 연인 달래 역을 한 송은지, 만석 어머니 노고산댁 역 김찬미도 극의 중심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특히 시립국악단 단원과 함께 참여했던 객원 연기자들의 안정적이며 열정적인 연기도 한 몫 했다.

‘동학농민혁명의 혁신적 공연 콘텐츠’를 지향하는 이 작품이기에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넘치는 듯한 장면과 극 초반부 만석과 달래의 사랑이 너무 길게 늘어져 지루해지는 문제 등은 다시 한번 검토해 봄직 하다. 또 공연시간이 100분을 넘기는데 구성을 좀 더 다듬어 10분 정도 줄이는 것도 고려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중소규모에 불과한 정읍시립국악단에서 이 정도의 작품이 나온 사실은 아주 고무적이다.

탄탄한 역사의식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갑오년 만석씨’ 공연이 여기서 머물지 않고 더 많은 무대에 서기를 기대한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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