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주말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옆자리도 비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봄이 한창이다. 벚꽃과 복숭아꽃이 맘껏 봄을 즐기고 있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나는 계절이 가는 것조차 잊고 살았다. 만약 오늘 서울행 열차를 타지 않았다면 올해도 아름다운 봄을 보지 못하고 여름을 맞이할 뻔했다. 바삐 사는 내게 가끔 여행도 다니면서 삶의 질을 높여보라는 어느 작가의 충고가 떠올랐다.

어제 원고 정리로 늦게 잠을 잤더니 졸렸다. 옆자리로 다리를 펴고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누군가가 나를 톡톡 쳤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음 역에서 탄 승객이 자기 자리를 앉으려는 신호였다. 얼굴도 보지 않고 미안하다고 한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옆자리에 한 여인이 앉았다. 50대 초반쯤 보이는 고운 얼굴을 가진 여인인데, 외국 배우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잠시 눈길이 갔다. 곁눈질로 얼굴을 확인한 뒤 의자에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서울까지 간다며 대답하고 자세를 바로 앉았는데 또다시 말을 걸었다. 그녀는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내 손에 들고 있는 책에 대해 물었다.

미모의 여인이 던진 질문 몇 마디에 내 마음을 싱숭생숭해졌다. 평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는데, 내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감정이 느껴진 것을 기억조차 없이 오래된 일이다. 아마 첫눈에 마음이 가는 것이 첫사랑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지금까지 여성을 여인이 아닌 사람으로만 보아왔으니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고속열차가 나오기 전에는 열차로 서울에 갈 때는 옆 사람과 대화를 많이 나누곤 다. 이동 시간이 길어 옆 사람과의 대화는 장거리 여행의 지겨움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동매점에서 달걀을 사서 나눠 먹기도 하기 가끔 맥주도 한 잔씩 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열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한 기억이 없다. 업무차 서울을 자주 다녔어도 대화는커녕 눈조차 맞추진 기억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낯선 여인과 대화는 다르다. 마음이 설레인다. 덕분에 서울까지 가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열차가 천천히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어디에 사는지, 자녀들과 부모님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하는 동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불편함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대기업에 중견 간부로 근무하고 있고, 자녀는 딸이 두 명이라고 했다. 자녀들은 대학생인데 뒷바라지하느라 힘이 든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자신의 생활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자신의 삶이 없다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낯선 사람이 대화하는 내내 마음이 편하다. 얼굴도 예뻤지만, 말도 조리 있게 해서인지 마음이 갔다. 지금 내 나이가 60세가 다 되었는데, 내게 아직도 이런 감정이 남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결혼하기 전에 연인과 연애하는 기분처럼 느껴졌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가는 법인가. 낯선 사람과의 대화시간 30분은 순식간에 흘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내릴 준비를 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우리는 가는 방향은 달랐다. 행선지가 나는 1호선 그녀는 3호선 지하철이었다. 즐거웠다는 인사를 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 열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뒷모습에 눈이 갔다. 잠시 지켜보았다. 나이가 들어 주책없는 행동을 하는 내가 낯설지만, 내게 이런 감정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관절이 약해 오래 걷는 것조차 힘든 늦가을 같은 내 몸인데 마음은 아직 봄기운이 숨어 있었나 보다.

지하철을 타려다가 서울역 밖으로 나와 잠시 봄 햇살을 맞았다. 여인의 여운이 남아 있는 따스한 봄날이다. 잠시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계절이 봄인 건 분명한가 보다. 싱숭생숭했던 마음을 봄 탓이라고 핑계를 대는 중년 남자의 어느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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