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화(농촌진흥청)

누가 참기름을 갖다 놓았을까? 설 연휴를 지내고 출근을 했는데, 책상 한 귀퉁이에 조그만 쇼핑백이 있었다. 그 속에는 짙은 갈색 액체가 가득 담긴 소주병 하나가 들어 있다. 옆자리 동료는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병뚜껑을 살짝 비틀었다. 미세한 틈새를 비집고 고소한 향이 새어 나왔다. 참기름이다. 참기름을 건네주던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다. 참기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 보았다.

어머니는 명절을 앞두고 매번 단골 방앗간을 찾는다. 내게 줄 참기름을 짜기 위해서다. 지난 명절에도 방앗간에 갔다. 커다란 무쇠 솥에서 참깨가 볶아지고 기름틀을 거쳐 기름이 만들어지는 동안 어머니는 자식 자랑, 손주 자랑으로 입이 바쁘다. 어머니는 방앗간 주인에게 농업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자식에게 줄 것이니, 특별히 신경을 써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자식이 지난 번 가지고 온 박카스는 좋은 참기름을 만들기 위한 뇌물로 기름집 사장에게 넘어간다. 어머니는 반나절이 훌쩍 지나 코르크 마개가 채워진 참기름병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는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명성이 높은 농업연구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자랑하지만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런 자식이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가끔 밤새 고민하다 아침도 거르고 출근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머니는 직장에 문제가 있나? 손주가 속을 썩이나? 별의별 상상을 하며 속앓이를 한다. 어머니는 동화처럼“열려라, 참깨”하고 주문을 외면 자식만큼은 행복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어머니는 늦은 봄 참깨를 심는다.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농업기술센터에서 실한 참깨 종자를 건내 주었다. 어머니는 언 땅이 풀리자 미생물들이 자라도록 목초액을 뿌린다. 춘삼월에는 이랑을 평평하게 정리한다. 4월 중순 뻐국새가 울까 걱정하며, 서둘러 이랑에 살짝 홈을 내가며 참깨씨를 뿌린다.

불볕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는 8월 말, 줄기의 아래부터 꼬투리가 익어 가면서 입을 벌린다. 수확의 시기이다. 참깨는 수확시기가 중요하다. 수확이 늦어지면 열매를 모두 땅에 떨어뜨린다. 어머니는 서둘러 새벽이슬이 마르기 전, 서슬 퍼런 낫을 들고 사각사각 베어낸다. 베어낸 참깨를 단으로 만든다. 햇볕이 잘 드는 벽을 골라 통풍이 잘 되도록 세워 말린다.

참깨와 비는 천적이다. 파종부터 수확까지 비를 맞을까 조바심을 낸다. 오죽하면,“가뭄 해 참깨는 풍년이 든다.”는 속담이 있을까. 어머니는 마실을 가거나 시장을 가서도 비가 올 날씨 같으면 길에 늘어온 참깨를 걷으러 간다.

선선한 구월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참깨 타작을 한다. 대문 앞에 파란색 천막을 게 펼쳐 놓고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바싹 마른 참깨단을 막대기로 털어낸다. 그리고 동네 어귀에 터를 잡고 숙달된 키질을 한다. 어머니의 키질에 쭉정이와 불순물은 바람에 실려 사라지고 깨끗한 참깨만 남는다. 그리고는 포대에 담아 창고에 두었다가 명절에 기름을 짜서 내게 준다.

어머니의 참기름 추억에 잠시 잠겼다가 다른 부서로 넘길 서류가 있어 사무실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과장님과 마주쳤다. 책상 옆에 참기름을 당신이 두었다며, 친정 부보님이 직접 지은 것으로 짠 참기름이란다. 이번 명절에 부모님이 주셨는데, 힘든 일 잘 견뎌주어서 고맙다는 답례라고 한다. 그리고 나와 함께 근무하게 되어 행복하다며 따뜻한 덕담까지 건네주었다. 가슴이 쿵하는 소리가 났지만 고맙다는 인사 대신 겸연쩍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건네주는 참기름처럼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회사와 가정에서 무척 힘든 일을 겪었다. 삶에 회의까지 느꼈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기도 하고, 자존감까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나에게 신은 죽은 것 같았다. 그런 메마른 삶에 참기름 한 병과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다. 힘든 삶은 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가족과 동료들도 나처럼 가끔 슬픈 발자국을 같이 밟고 있을 수도 있다. 아픈 흔적들 또한 내 생애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것들 또한 진정한 나의 사랑이라는 깨달음으로 진한 기쁨의 한숨을 날린다. 따뜻한 분에게 건네받은 참기름 한 병이 질펀한 어둠의 늪에서 나를 당겨주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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