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 사이 옛전주 ‘완산’이 숨쉬고 있다

김대연 기자l승인2021.02.16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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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중심지라고 불렸던 완산(完山). 완산은 전주의 옛 지명이며, 오늘날 전라도와 제주도를 담당했던 행정중심지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경기전, 객사 등과 같은 목조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보물 제1876호 완산부지도(完山府地圖)를 보면 옛 전주의 위상을 확인해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살아남은 풍남문에서부터 완동문(完東門)·공복문(拱北門)·패서문(沛西門) 순으로 전라도 수부 도시였던 전주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껴보자.

▲완동문(完東門)에 남겨진 단골의 발자국                                   

전주 부성의 동문, 완동문(完東門)으로 가는 길에는 경기전과 중앙초등학교, 최명희문학관 등이 있다. 경기전 담과 정비된 도로가 완동문까지 이어져 있다. 가면 갈수록 대체 어디에 완동문(完東門)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편의점 바로 앞에는 외로운 비석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주 동쪽에는 진안, 무주와 같은 산지 지역이 분포해 있는데 산지에서 생활하는 백성들이 지게에 나무를 지고 동문으로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동문지 주변에는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동문예술거리’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기는 책방이 모여 있는 ‘서점 거리’, 한때 조선 시대 감옥이 있었던 ‘한국전통문화전당’이 있다.
성문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의 기억 속에 전주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장소이다. 한때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젊은이와 맛을 즐기는 미식가들이 자주 다녀갔으나 구도심이 쇠퇴하면서 곳곳에 빈 가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거리를 지키고 있는 건 옛 감성을 그리워하는 단골뿐이다.
성문의 흔적을 잠시나마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한국전통문화전당 방향으로 올라가면 작은 골목을 볼 수 있다. 골목에서 왼편은 성의 안쪽이고, 오른편은 성의 바깥쪽이다. 이곳은 전주 부성의 북동쪽 모퉁이 안쪽으로 굽혀진 골목길인데 정확하게 길이 남아있는 덕분인지, 최근 성벽의 기초시설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점토와 기와를 섞어 땅 위에 펴고 하단석으로 사용할 수 있는 큰 돌을 깔아 올렸으며, 빈 곳에 여러 돌을 넣어 채우는 방식으로 성을 쌓았다. 전주 부성이 언제 지어졌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백제 시대로 추정되는 층위에서 건물의 흔적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시대 전부터 전주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공복문(拱北門)의 의미에서 영화 에티켓이 탄생하다
북동쪽 굽혀진 길을 지나서 팔북로 방향으로 걸어가면 전주 부성의 북문, 공복문(拱北門) 있던 곳에 갈 수 있다. 걸어가면 갈수록 전주시민들에게 익숙한 장소가 나오기 시작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영화의 거리가 있는 오거리가 북문지이다.
영화를 찍고 있는 동상 뒤에는 쓸쓸히 자리를 지키는 비석이 있다. 1907년 사라진 공복문(拱北門)의 위치를 알려주는 비석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역이었던 농민들이 전주 화약을 맺고 집으로 돌아갈 때 북문을 통해 나갔다고 전해진다. 객사 거리에 몰려든 농민들이 전주 오거리로 나오는 상상을 해보자.
공복문(拱北門)은 ‘북쪽에 공손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주 북쪽에는 조선 시대 왕이 사는 한양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주는 조선왕조의 시작점 여겨지는 지역이었기에 왕에 대한 예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북문은 왕이 사는 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문을 개방하지 않았다. 전라감사가 전라감영에 부임할 때도 성의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오는 게 관례라고 전해진다.
영화제가 열리면 이곳은 영화 마니아 층으로 북적거리는 곳이다. 북문지에서부터 서문지 구역까지 디지털영화제작소, CGV, 조이시네마 등 영화와 관련된 곳들이 모여있고 유명한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1925년 전주 최초의 극장, 제국관이 들어서고 당시 인기 많았던 전국명창경연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명창들과 탤런트들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관광호텔이 객사에 자리 잡고 전주시민들의 문화활동 붐에 힘입어 지금의 모습까지 오게 됐다.
▲변화의 시작, 패서문(沛西門)
마지막으로 전주 부성의 서쪽문, 패서문(沛西門)으로 가보자. 객리단길을 지나 충경로를 건너면 중국식 문과 초라한 거리를 볼 수 있다. 동문지와 북문지에서는 비석이라도 있었는데 서문지에는 없는 것일까 좌절하고 있을 때, 파출소 터 앞에 주차된 차로 가려진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패서문(沛西門)이란 이름은 한나라 고조의 고향을 의미하는 풍패(豊沛)에서 따왔다. 풍패(豊沛)는 건국자의 고향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돼와 조선 왕실은 이성계의 고향임을 알리고, 도시의 격을 높이고자 했다. 남문은 풍(豊)에서 따와 풍남문, 서문은 패(沛)에서 따와 패서문(沛西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패서문(沛西門)은 전주 부성 중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문 중 한 곳이다. 외세가 전주에 처음 들어온 곳이 바로 서문이다. 일본 상인의 품질과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조선 상인들은 몰락하며 일본인들의 상권이 더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07년 일제가 양곡 반출을 위해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를 개설하면서 서문이 헐리게 됐다.
전주 부성의 시작점인 풍남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라감사 조현명이 1734년(영조10년) 전주 부성을 새로 축조했지만, 화재와 일제의 만행에 의해 현재는 초라한 터에서 상상으로 만족해야 한다. 조선 재정의 1/3을 차지한 전주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는 전주의 대표 관광지 경기전, 풍패지관, 풍남문 등이 증명하고 있다.
웨리단 길, 전주 오거리 영화의 거리, 한옥마을.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동네 한 바퀴 걷는 편안함으로 주변을 둘러싼 약 4km의 전주 부성의 흔적을 찾아보자. 평소에는 잘 접했지 못했던 이전과는 다른 전주의 모습에 빠지실 수 있을 것이다./김대연기자·red@/자료제공= 전북도청 전북의 재발견


김대연 기자  saint-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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