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국민연금공단

군대를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를 도시로 유학 간 동생과 함께 지냈는데, 할머니가 식사를 해 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았는데도 자처하여 동생에게 밥을 해 주었다. 제대를 하고 난 뒤 나는 고향에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주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동생이 살고 있는 사글세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독서실에 다녔다.
 당시 동생은 대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동생은 형의 간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런 동생을 할머니는 늘 애틋하게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동생은 손자들 중에서 최고였다. 새벽까지 공부하는 동생에게 할머니는 밤만 되면 잠을 자라는 노래를 불렀을 정도였다. 어쩌다 늦잠을 자는 날이면 내가 동생을 깨웠다. 흔들다가 안 되면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화를 냈다. 밤늦게 공부하고 잤는데, 형이 잠도 못 자게 때린다는 것이다. 나는 동생방에서 지내면서 할머니에게 못된 형이라는 미운털이 조금씩 박혀 갔다. 동생은 착하고 나는 동생을 구박하는 못된 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운털이 박히는 큰 사고가 터졌다. 어느 날 저녁, 할머니는 계란후라이 두개를 반찬으로 내놓았다. 당신 것은 없고 나와 동생이 먹을 계란후라이였다. 당시 할머니에게 계란은 최고의 반찬이었다. 쇠고기는 정육점에서 조차 없었고, 돼지고기는 명절 때만 구경하던 시절이었다.    할머니가 며칠 동안 나물을 뜯어 팔아 산 계란이었다. 그 계란을 계란후라이를 만들어 저녁 반찬으로 내 놓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동생은 계란후라이를 젓가락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하자마자 계란후라이를 먹었는데, 동생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동생을 툭 치며 계란후라이를 왜 안 먹냐고 하자, ‘형. 먹어’ 하며 나에게 양보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은 계란후라이를 입에 넣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귀가 멍했다. 못된 형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을 구박하는 형이었는데, 이제는 아주 못된 형이 되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힘들게 공부하는 동생에게 양보는 못할망정, 빈둥빈둥 놀면서 동생의 계란후라이까지 뺏어 먹는다고 화를 냈다. 입 안에는 계란후라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성화에 뱉을 수가 없었지만, 뱉는다고 먹을 동생이 아니었다. 입에 든 계란후라이를 먹고 껄껄 웃으며 동생이 먹지 않아 내가 먹었다고 변명을 했지만, 할머니는 그때부터 나를 못된 형으로 낙인찍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뒤끝은 오래갔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십여 년 이상 동생과 함께 있으면 계란후라이 얘기를 했다. 부모님까지 나서서 내가 못된 형은 아니라며 변명했지만, 할머니의 기억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할머니 말씀처럼 내가 못난 형이었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생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던가. 지금도 동생만큼 마음이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번은 동생이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울컥 났다. 잘해주지는 못하지만,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형의 마음이다.
 사실 나는 그리 못된 형은 아니었다. 내가 1년 동안 휴학을 하면서 동생에게 과외를 해 주었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재수를 시켜 좋은 대학에 가도록 도움도 주었다. 입사를 한 뒤에는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용돈을 준 기억도 많다. 내가 결혼을 한 뒤 이사할 때 잘 돌봐준 형이  고맙다며 김치냉장고를 선물로 한 것을 보면 아주 못된 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주 조상님 이장을 하면서 할머니 생각이 났다. 당뇨합병증으로 귀가 멀고 눈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 손을 잡으면 우리 큰애 이름을 불렀던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손주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사셨다.
 할머니 산소에서 동생의 계란후라이 때문에 혼이 난 기억이 떠오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몇 년이 되었을까 손꼽아 보았다. 30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찾은 산소라서인지,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라며 호통 치는 할머니의 천둥소리가 유난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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