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고창 고인돌 유적. 화순?강화와 더불어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대의 무덤 유물이다. 거석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그 태고의 신비를 찾아 나선다. 선사시대를 풍미했던 선사인들의 삶과 죽음 속으로.

질마재 1코스 고인돌길 따라

고인돌박물관에서 장살비재로 빠지는 1코스 고인돌길.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 중 한 코스다. 8.9km 정도 되는 이 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유적이 현존한다. 고인돌박물관을 빙 돌아 뒤쪽으로 난 고인돌교를 지나 선사마을로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생사마저도 놓아지는 여유와 숨이 모아진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 유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인돌 군집을 자랑한다. 1.5km 안에 440여 기의 다양한 고인돌이 모여 있는 것이다. 3만여 기 이상 분포되어 있는 국내의 고인돌 중 전라북도에 분포된 고인돌은 2,600여 기 이상이다. 그 중 63% 이상인 1,680여 기의 고인돌이 고창 산허리를 장식하고 있다. 하여 이곳을 ‘고인돌 떼무덤’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운곡람사르습지 생태길로 접어드는 초입에서 고인돌 유적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특별했다. 자연의 신비와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애초에 사후세계를 알고 가야 하는 것처럼 여겨져서다. 삶 밖의, 혹은 삶 안 깊숙한 곳에 있는 세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창의 고인돌

‘고인돌’은 기반식 고인돌에서 비롯된 순우리말이다.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한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는데,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다가 철기시대에 사라진 큰 돌무덤을 말한다. 고창지역의 고인돌은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으며,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곳의 고인돌들은 작은 것부터 집채만 한 것까지, 그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일대를 찬찬히 걷다 보면, 무게 100톤의 초대형 고인돌부터 길이가 1m도 안 되는 것들도 있다. 그중에는 받침돌 위에 올려진 덮개돌의 무게만 10톤에서 40톤에 이르는 것도 있다. 무려 200톤에 달하는 무거운 돌이 올라간 것도 있는데, 제작 과정이 도무지 가늠이 안 될 정도다.

220기의 고인돌은 2열로 배열되어 있어 만들어진 시대 순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바둑편형인 남방식과 탁자형인 북방식 등 그 형태 또한 다양하다. 각 고인돌마다 번호를 붙여 관리하지만, 바코드를 넣은 비석이 박혀 있는 것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반면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것도 고인돌이야?’ 싶은 것들도 꽤 있다. 즉 눈에 보이는 모든 바위들을 고인돌로 보아도 될 만큼 이곳 죽림리 일대에는 고인돌이 사방에 널려 있다는 얘기다.

인근 지동마을 한 외딴집 뒤에는 남한땅에서 가장 잘 생겼다는 탁자식 고인돌 한 기가 있다. 일명 ‘도산리 고인돌’로 불리는데,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이기도 하다. 이는 북방민족의 지도자가 한반도 남단까지 내려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미국의 한 고인돌 전문가가 와서 ‘도산리 고인돌’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남방식과 달리 두 개의 튼튼한 다리로 편평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기개 있는 모습 때문일 거라.

하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 이 넓고 평평한 고인돌 상석의 쓰임새는 따로 있었다. 부끄럽게도 유물임을 알아보지 못한 동네 아낙들이 산나물 말리는 데에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세계적인 보존 유산이 되어 떡하니 명찰을 달게 되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크게 놀랄 만도 했겠다. 아무튼 사람이든 고인돌이든 간에 알아봐주는 눈이 있어야 성공하는 법이다.

선사인들은 고인돌을 왜 만들었을까

‘지명에 창(敞) 자가 들어가 있으면, 그 지역은 넓은 평원으로 되어 있어 본래 살기가 좋다’는 옛 말이 있다. 고창에 고인돌 밀집 분포도 면에서 세계 1위라고 할 만큼 많은 고인돌이 있다는 건, 옛 말처럼 이곳이 사람 살기가 그만큼 좋았을지도 모른다. 전망이 확 트인 데다 땅이 넓어 실제로 그 옛날에는 상당히 큰 수도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도 같다.

고인돌을 세운 청동기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협동으로 족장의 무덤을 만들었다. 부족을 다스리는 족장이나 제사장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를 무덤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고인돌이 단순하게 무덤의 기능으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도 필요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우상화된 상징물이기도 했다. 무거운 돌을 날라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힘을 들여야 했을 터. 그것이 감히 손으로 쓸어보지도 못할 완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가 될까.

고인돌 사회는 사회적 계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평등사회였다는 주장도 있다. 출토된 부장품 가운데 사회적 계층화를 가리키는 뚜렷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 고인돌은 평등사회에서 마을 구성원들의 자발적 협동작업으로 축조된 일반 주민들의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지구 안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쓰인 묘들도 몇이나 있어, 수세기 전 무덤과 현재의 무덤 양식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졸지에 고인돌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우를 받게 된 그 묘들을 보면서, 살아서든 죽어서든 복 받는 이는 따로 있는 것인가, 피식 웃음이 머금어진다.

이 많은 고인돌 중 명당중의 명당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명당론은 전설처럼 떠돌기만 할 뿐, 아무도 그 터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굳이 명당 터를 찾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인돌이 모여 있는 전체 면적을 빙 둘러보았다. 얼핏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삶과 죽음, 오고 감,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윤회하는 실상이 만져졌을까. 시대와 함께 죽음으로 가는 행차길도 달라지고 있는 요즘이 조금은 씁쓸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동양 최대 고인돌을 찾아서

고인돌 축조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채석장이다. 죽림리는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백제의 테뫼식 산성이 이곳의 채석장을 둘러싸고 있다. 채석장을 지나 삽십 분쯤 걸어 운곡습지생태공원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동양 최대의 고인돌을 보기 위해서다.

아직 개관하지 않은 운곡람사르습지 홍보관 앞쪽에서 덮개골 길이 5.5m, 높이 4.5m, 두께 4m로 무게가 무려 300톤에 달하는 고인돌을 만났다. 청정한 곳에만 자란다는 지의류가 고인돌을 감싸고 있어 태곳적 신비마저 느껴지는 초대형 고인돌. 남방식과 달리 상석 밑에 지석을 괴고 있어 비현실적일 만큼 위풍이 있고 담대한 모습이다. 운곡람사르습지로 드나드는 초입의 고인돌 유적지에 이어 습지가 끝나는 곳에서 맞닥뜨리게 된 고인돌이었다.

사실 고인돌은 세계 곳곳에 분포한다. 영국이나 아일래드는 물론 티베트, 쓰촨, 간쑤와 같은 중국 서부와 산둥반도, 일본 규슈 북서지방과 같은 해안지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사후 처리 방안에 대한 답을 ‘돌’에서 찾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사자의 흔적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무언가를 남기려는 본능적인 인간의 욕구는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죽는다. 목숨 있는 모든 것들은 진실로 이러한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가는 과정에서 내가 이 길의 한 구간만이라도 걷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문득 생사를 거듭하거나, 거듭 헛된 삶으로 드는 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아닌 죽음이 먼저 시작되는, 눅진한 고인돌길을 돌아 나오면서.
/글 사진 김형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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