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에서 우연히 ‘오느른’이라는 채널을 발견했다. ‘MBC PD의 리틀포레스트’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몇 년 전에 <리틀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유명한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였다. 편의점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며 각박한 서울살이를 하던 주인공이 고향에 내려와 텃밭을 가꾸면서 어릴 적 친구들과 오손도손 살아가는, 일종의 ‘힐링 드라마’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유튜브 채널도 비슷한 분위기다. 서울에서 방송국에 다니는 젊은 여성 PD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제에 와서 폐가를 고쳐 살고 있다. 그가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리는 동영상들은 움직이는 수채화 같은 느낌이다.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지붕 낮은 집, 낡은 집을 여러 달째 천천히 고치고 있는 젊은 집주인, 낯선 도시처녀의 시골살이 가이드를 자처하시는 이웃집 어르신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따라 떨어지는 빗방울과 마당에 핀 풀꽃들이 주인공들이다. 배경음악은 사뿐사뿐하고 자막은 차분하다.

이 젊은이는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와서 왜 그러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전화했더니 선뜻 주소를 알려주었다. 한 시간쯤 자동차를 운전해서 찾아갔다. 화면에서 보던 것처럼 들판 한 가운데 여남은 집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의 모퉁이에 그 집이 있었다. 마당은 넓고 담장은 야트막한 볕 잘 드는 남향집이다. 마당 군데군데 최근까지 집을 고친 흔적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예전에 창고였던 건물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들녘이 내다보이는 창 앞에 앉아 영상편집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낯선 동네에서 대문도 없는 시골집에 혼자 사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도 안 무섭단다.

덜컥 사버린 폐가

최별 씨는 2012년부터 방송 일을 해오고 있는 8년차 PD다. 시골에 살아본 적 없는 서울 토박이지만, 오래 전부터 시골집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었단다. 몇 년 동안 모아온 얼마간의 돈에다 대출금을 합쳐서 집을 사려고 강화도 근처를 알아보았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온라인 부동산 소개 사이트를 통해서 이 집을 알게 되었다. 산골짜기가 아닌 너른 평야에 있고 마당이 삼백 평이나 된다는 것에 마음이 동했다. 당장 자동차를 빌려서 친구와 함께 집을 구경하러 왔다. 집 구경을 하고 있는 그들을 이웃집 어르신들이 구경하러 나오셨단다. 난데없이 다 쓰러져가는 집을 사겠다고 나타난 젊은 여자들이 신기하셨던 모양이다.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나름 물정에 밝은 친구와 동행했던 이유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냉정하게 말려달라는 의도였다. 그런데 말리라고 데려온 그 친구가 오히려 “이웃 분들이 참 좋으시다”며 이 집을 사라고 부추겼다. 그래서 덜컥 가계약을 해버렸다.

집을 계약해놓고 회사에 기획안을 제출했다. 여차하면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김제에 내려와서 살까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방송사 소속PD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 시골살이를 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시골집을 고쳐가면서 사는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브이로그를 만들어볼 테니 ‘업무’로 인정해달라고 했다. 이제껏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기획이다 보니 회사 측도 반신반의하면서 망설였다. 의사결정이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회사는 그의 ‘재택근무’를 인정해주고 자동차와 촬영감독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방송사 직원이 브이로그 동영상 제작을 공식 업무로 인정받은 첫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기획안이 받아들여지고 나니 갑자기 불안해졌다고 한다. ‘힐링’하겠다고 산 시골집이 ‘업무공간’이 돼버린 것이다. 이게 맞나? 잘하는 짓일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더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래 버려졌던 폐가를 고치는 것도 큰 걱정거리였다. 집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란했다. 등기를 내려고 알아보니 1905년에 지어진 집이었다. 무려 115살 된 집답게 모든 것이 낡아 있었다. 마지막 집주인이 버려두고 간 세간과 잡동사니들을 들어내는 데에만 몇날며칠 걸렸고 마대자루로 수십 포대의 쓰레기를 실어냈다. 그 와중에도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내 잘 닦아서 활용하고 있기는 하다. 낡은 벽지를 뜯어내니 습기 축축하고 갈라진 흙벽에 벌레들이 시글시글했다. 그렇게 낡은 집을 어떻게 고치냐며 그냥 헐고 다시 짓는 게 낫다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집을 잘못 산 것 아닐까 잠깐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 오랜 세월을 버텨온 집을 허무는 게 내키지 않아서 고쳐 살기로 했다.

“제가 본래 당돌하고 고집이 센 편이거든요.” 그는 일찍부터 독립해서 혼자 살았다. 어릴 때부터 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재수를 해서라도 더 이름난 명문대학에 들어가라고 강권하셨지만 순종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일체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햇볕 한줌 들지 않는 지하실 고시원의 다인실에 살았다. 이층침대에 누우면 불과 두세 뼘 앞이 천장이었다. 어둡고 눅눅한 그 방에 살면서 창문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한푼 두푼 돈을 모아 볕이 들고 앞이 트인 옥탑방으로 옮겼을 때는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다. 어쩌면 그 시절부터, 마당 있고 창 넓은 집에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던 것 같다.

아버지는 만화가이셨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방송작가이셨다고 한다. 어쩐지 그가 만든 영상들이 그림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했다. 열아홉 살 때 집을 나온 이후로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그런지, 그가 시골에 집을 샀다고 불쑥 통보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많이 놀라거나 화내지 않으셨다. 그때가 마침 그가 스트레스성 장염으로 입원해 있는 동안 아버지가 병문안 오셨을 때였으니 아픈 딸에게 차마 화내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렇게 아버지의 사후 동의를 받아냈다.  집의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던 데다가 긴 장마까지 겹쳐서 집수리가 오래 걸렸다. 집을 계약한 후 4월 하순 무렵부터 청소와 수리를 시작했는데 8월초에야 입주할 수 있었다. 비용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집값보다 수리비용이 더 들었다. 서울에 살던 전셋집의 보증금을 빼서 수리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그러니 집이 다 고쳐질 때까지 서울에도 김제에도 거처할 곳이 없어서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옆집 ‘이 여사님’께서 방 한 칸을 공짜로 내주시고 밥도 먹여주셨다. 말로만 들었던 ‘시골 인심’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정 많은 ‘동네 친구’들

이 여사님은 60대 중반의 젊은 할머니다. 뜬금없이 동네에 깃든 최 PD를 딸처럼 보살펴 주시면서도 오지랖 넓게 사사건건 참견하지는 않으신다. 반찬거리부터 텃밭 채소 기르기까지 살뜰하게 챙겨주시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으시는 지혜로움에서 ‘어른다움’을 느낀다. 또 다른 이웃인 ‘아버님’은 올해 95세 되신 6.25 참전용사이시다. 사실 할아버지 연배쯤 되시지만 할아버지보다 아버님이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 동네사람들이 다들 “강구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니 자제분의 이름이 ‘강구’일 거라고 짐작만 한다. 처음 집 구경을 왔던 날 강구아버지는 담장너머로 첫인사를 나누면서 “나도 여기 이사 온 사람이오.”하셨다. 그래서 도시에 살다가 귀촌하신 분이라고 짐작하고 언제 이사 오셨냐고 여쭤봤더니, “한 칠십 년쯤 됐지.” 그러셨다. 마당에 난 이름 모를 꽃이 배추꽃이라고 알려주신 분도 강구아버지셨다. 먹어도 되는 꽃이라길래 배추꽃을 얹어 감자전을 부쳐 먹었다. 이런 ‘동네친구들’과 함께 사니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시골에 살다보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됐다. 보통 아침 다섯 시쯤 일어나고 저녁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든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강아지와 함께 동네 산책을 하고 나서 동영상을 편집하고 유튜브 구독자들과 댓글로 소통한다. 지난 6월 초에 개설한 유튜브 채널은 어느새 구독자가 19만 명을 넘었다. 업로드한 동영상마다 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촬영감독과 함께 영상을 촬영하고 ‘오느른’ 이름으로 개설된 각종 SNS 계정들을 관리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틈나는 대로 텃밭도 가꾸고 동네 이웃들과 꽃차를 마시고 쑥개떡을 나눠먹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재택근무와 사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휴식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일상이다. 가끔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순간순간에 집중하고 그날그날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실감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느낌으로 설레는 삶, 서울에 있을 때처럼 감정의 기복이 없는 삶이 참 좋단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채널 이름을 왜 ‘오느른’이라고 지었는지 물었다. 처음에 기획안을 썼을 때는 ‘오늘은’이었다고 한다. 매일매일 다르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같은 팀에 있는 후배 PD가 ‘오늘을 사는 어른들’을 줄여서 ‘오느른’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부여하는 ‘오느른’의 의미는 여러 가지다. 우선 두 가지의 어른들이다. 시골살이를 통해 만나게 된 오늘을 열심히 사시는 어른들이 그 첫 번째이고, 오늘 하루만 사는 것처럼 지르면서 사는 요즘 세상의 어른들이 두 번째다. 마지막 한 가지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이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단다. 눈을 뜨면 맞게 되는 하루하루에 대한 설렘이다.

※첨부한 사진 중 1,2,3번은 유튜브 채널 ‘오느른’ 화면 캡쳐입니다. 사진 게재 시 저작권표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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