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서지 않는 김제 부용역, KTX가 지나가는 외로운 철로만이 남아 이곳을 오간 이들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한때 번화했던 역 앞,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오고 갔고 먹을거리들이 풍부했다. 문득 수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이었을 부용역 일대의 옛 모습이 궁금해졌다. 오래된 건물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회색의 먼지처럼 뿌옇게 쌓여있었던 부용역 앞으로 떠나보자.

▲열차가 서지 않는 역, 김제 부용역
김제 백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부용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는 무인역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1월 1일 영업을 시작해 김제에서 나는 쌀과, 익산이나 군산으로 가는 이들을 실어 날랐다. 1958년 7월 31일에 지금 남아있는 이 역사를 새로 지었고, 제법 많은 이들이 오고가는 번잡한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용객들이 줄어들게 되자 2008년부터 역무실을 폐쇄했고, 운영을 중단했다.
역 이름인 ‘부용’을 한자로 적으면 芙蓉, 즉 연꽃이라는 뜻이다. 부용역은 행정구역으로 백구면 월봉리에 있는데 이름이 부용역이 된 배경에는, 일제 강점기 이 역을 주로 이용해 쌀을 수탈해가던 일본인들이 살던 곳이 부용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용역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였고, 오일장이 설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역 앞에서 조금 더 나가보니 양 옆 도로변에 미용실, 마트, 당구장, 노래방, 이용원, 통닭집 등등 온통 ‘부용’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가 골목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 시절 그 때를 짐작케 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이 부용역 앞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
 1920년대 지어진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국가등록문화재 지정 2005년 6월18일)은 일본인들의 경제 수탈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소규모 금융조합 건물이다.
부용역과 불과 2~300m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현관이 돌출된 丁자형 평면에, 지붕은 함석을 얹었고, 내부는 금융회사의 건물답게 비교적 높은 천장으로 구성돼 있다.
곡창지대인 김제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해 가는 데 선봉적 역할을 했던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부용역과 백구금융조합을 중심으로 쌀과 포도 등 농산물을 가공하고 보관, 운반하는 대규모 공장 시설이 밀집하게 됐다.
 ▲김제 구 월봉도정공장
일제강점기 벼를 도정하던 곳으로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 건물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당시 김제평야에서 난 쌀과 이로 인한 경제적인 이익을 일본이 가져갔으며, 부용역과 백구금융조합 도정공장이 한 곳에 자리한 것도 일본의 치밀한 경제 수탈의 흔적 중 하나이다. 도정공장의 규모가 엄청 나 김제 일원에서 난 쌀이 모두 이곳에서 도정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오오쓰미가 설립, 운영했고 이름도 오오스미 도정공장이라고 불리었으며 2000년 초반까지 가동되기도 했다. 공장 맞은편 역세권 안에는 우체국까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계획적인 쌀 수탈에 대한 흔적들이 너무도 고스란히 남아 당시 억압된 주민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는 곳이다.
부용역 앞 중앙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지금은 대부분의 점포들이 비어있지만, 상당히 번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건물들 중 대부분이 일제가옥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아직도 건물들 대부분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낡고 부식된 건물들만이 소리 없이 말하고 있는 근대 역사의 흔적들, 많은 이들이 알 수 있도록 좀 더 세심한 관리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용역 주변은 군산 구도심을 찾았을 때의 감정과 비슷한 아릿한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더 오랜 시간 방치되기 전에,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고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게끔 만드는 것도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김대연기자·red@/자료제공= 전북도청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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