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로 유난히 물이 많은 여름이다. 원인이야 우리 인간에게 있겠지만 그 물로 인한 상처가 크다. 하지만 폭포는 물이 없으면 폭포가 아니다. 비가 부슬거리던 여름날 폭포를 찾아 나섰다.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위봉폭포. 완산 8경 중의 하나다. 세상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봉폭포는 의연하게 폭포 본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무계단에서 멀리 바라본 폭포는 녹음 속에 감춰진 검은 바위 사이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신비스럽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때마침 내리던 비가 개어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기운이 서렸다. 가히 선경(仙境)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다른 모습, 다른 소리를 들려주던 위봉폭포. 가까이 갔을 때 ‘높이 60m에 2단으로 쏟아지는 폭포’라는 표지판의 설명이 무색하리만큼 장마 중의 폭포는 김수영의 시 「폭포」처럼 “무서운 기색도 없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곧은 소리”로, 그러나 단 한 번도 같은 소리가 아닌 폭포 소리는 태만하고 이기적인 나를 향해 내리치는 죽비(竹?)소리로 들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300여 년 전, 양반광대(兩班廣大) 비가비명창 권삼득은 이곳에서 무슨 소리로 득음을 하였을까.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흥보가」였을까. 군로사령이 춘향이 잡으러 가는 「춘향가」였을까. 목 놓아 폭포 소리를 뚫고 득음을 위해 피를 토했을 그를 생각하며 할 줄 모르는 쑥대머리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폭포 절벽에 귀를 걸어 놓고 위봉사로 향했다. 고려 공민왕 때에는 사찰의 건물이 28동이었고 암자도 10동이나 되는 대가람이었으며 일본강점기에는 선교31본산(禪敎三十一本山)의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46개 사찰을 관할하였으나 여러 차례 화재로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가는 고행의 각도일까.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일주문을 통해 올려다보니 사천왕문과 봉서루, 그리고 주 건물인 보광명전(普光明殿)의 지붕까지 이 모든 것이 한 단계씩 경계를 두고 한눈에 들어왔다. 봉황이 머물던 자리 봉서루(鳳棲樓)를 지나 경내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보광명전(보물 608호), 관음전, 극락전, 나한전이 바라보고 있는 정갈한 마당에는 오랜 세월 부처님과 함께했을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곁에는 무심한 듯 쌓아 올린 돌탑이 벗하고 있었다. 화암사가 잘 늙은 절이라면 위봉사는 정갈하고 단아한 절이라 하겠다.

위봉사 근거리에 있는 위봉산성은 둘레가 약 16km로 조선 숙종 원년에서 숙종 8년에 쌓은 산성이다. 변란이 있을 때 백성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목적 외에도 유사시에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상징인 태조어진, 그리고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판을 옮겨와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게 전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태조의 진영과 위판 등을 이 산성으로 옮겨오기도 했다고 한다. 내리는 비로 인해 성곽을 따라 걸어보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위봉사가 세 마리의 봉황이 머물렀던 자리라 전해지는 것은, 위봉사와 위봉산성, 위봉폭포를 두고 한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수선한 시절에 장마까지 길어지는 올여름, 세 마리의 봉황을 찾아 나서보면 어떨까. 폭포 물줄기에 더위와 시름을 씻어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맑은 가을 하늘을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
/그림 김문철 글 김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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