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수와 미경, 그리고 선미의 시선이 엇갈린 채석강

흔히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잊고 산다. 이를테면 가족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내게 변산은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가까이 있어 그 소중함과 가치를 몰랐던 곳 말이다. 심지어 저 멀리 타 지역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볼 때면 ‘굳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변산을 배경으로 영화로 만나게 됐다. 별 기대 없이 본 영화는 꽤 괜찮은 영화였고, 변산에 대한 내 생각마저 완전히 바꿔놓았다. 너무 자주 가서 지겨웠던 곳은 친근한 곳으로, 낯선 곳은 새로운 곳으로 만들어준 영화 <변산>에 감사한 마음을 안고 부안군 일대를 돌아보았다.

영화 <변산>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의 2018년 작품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변산 일대가 주요 배경이다. 그리고 그 변산이 고향인 주인공 학수가 고향을 부정하고 미워하다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여기에 그토록 미워했던 가족, 무시했던 친구와 화해하는 내용으로 감동과 재미를 더한다. 갖은 아르바이트로 고된 서울살이를 하는 무명 래퍼 학수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잊고 싶던 고향으로 향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곳에서 자신을 짝사랑하는 친구, 자신이 짝사랑했던 친구, 자신이 무시했던 친구, 자신의 시를 도둑질해 간 선배 등을 만나며 얽히고설킨 관계를 풀어나간다. 영화 속 그곳을 만나러 떠난 여정은 학수가 짝사랑하던 미경이 운영하는 피아노학원을 시작으로, 엄마를 떠나보내고 노을을 바라보던 언덕, 학수와 미경, 그리고 선미의 엇갈린 시선이 오가던 채석강, 학수와 용대가 뒤엉켜 싸우던 작당마을 갯벌까지 이어졌다.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녀’의 피아노학원
부안군청 앞 골목 ‘별빛으로’에 자리한 일식당 <소우>. 학수(박정민 분)의 첫사랑 미경(신현빈 분)이 운영하는 피아노학원으로 등장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의 형태를 크게 바꾸지 않아 다소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게 입구 작은 칠판에 영화 <변산> 촬영지라는 문구가 반갑다. 시간이 흘러 촬영장소라는 글자는 거의 지워져 있는데 그마저도 정겹다. 그 아래로 <비엔나 피아노>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영화를 보고 찾은 이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풍경이리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부를 채운 식탁들로 영화 속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영화 포스터와 출연배우들의 사인이 다시 한 번 이곳이 <변산>의 촬영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따듯하고 아늑한 내부를 살펴본 뒤, 통유리창 옆의 작은 문을 열고 나가니 뒷마당이 나온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들과 작은 테이블, 비를 맞아 더욱 푸르른 담쟁이덩굴, 그리고 천연기념물 호랑가시나무까지. 작은 정원 안에 볼거리가 넘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는 미경은 학수의 첫사랑인 동시에 학수의 시를 훔쳐 간 선배(김준한 분)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자, 어린 시절 무시한 친구에서 이제는 모시는 친구가 된 용대(고준 분)에게 끼를 부리는 문제적 여자다. 비록 학수의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학수에게는 슬픈 장소일지 몰라도 영화 촬영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방문해도 실망하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곳이었다. 촬영 당시 배우들이 실제로 여러 번 식사도 했던 곳이라 하니 배우가 된 기분으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 유명한 시가 떠오르는 곳, 대항리 패총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문구는 대사가 아닌 짧은 시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학창시절 학수가 연습장에 끄적인 바로 그 시. 교생으로 온 선배 원준이 보고 빼앗은 바로 그 시가 탄생한 곳이자, 학수를 짝사랑한 친구이자 자칭 ‘노을 마니아’라 하는 선미(김고은 분)가 노을을 사랑하게 된 바로 그곳이다.
“내가 노을 마니아라고 혔지? 나한테 노을을 발견시켜준 사람이 바로 너여.”
뜬금없는 선미의 고백에 학수는 멍해진다. 선미는 변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등단한 작가다. 그리고 선미를 작가로 만든 사람이 바로 학수였다. 고등학교 시절 선미는 엄마 무덤 앞에 앉아 있는 학수를 바라보다 학수의 시선을 따라 노을을 보고 노을을 사랑하게 됐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학수가 노을을 바라보던 바로 그 언덕은 변산해수욕장과 격포 해수욕장 사이 대항리 패총 근처에서 촬영했다. 촬영을 위해 부러 길을 냈던 그 언덕은 어느새 풀이 무성하게 자라 오를 수 없었고, 날이 흐려 학수가 보던 낙조도 볼 수 없었지만, 언덕 맞은편 작은 해안의 고즈넉한 풍경이 아쉬움을 달래줬다. 그리고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킨 낙조를 보기 위해서 다시 꼭 찾으리라는 다짐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마도 그때는 노을을 보며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미는 선미를 보며 “니 뭐하냐, 지금?”하고 묻는 학수도, “노을한테 키스하는 것이여”라고 답하는 선미의 모습도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학수와 용대가 진흙탕 싸움을 벌인 작당마을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촬영된 곳이자, 인상적인 스틸 컷을 남긴 곳은 부안군 진서면의 작당마을이다. 학수와 용대는 작당마을 앞 갯벌에서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을 펼쳤다. 그 명장면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앞서 격포 채석강에 들렀다. 채석강에서는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르며 미경을 바라보는 학수, 그리고 그런 학수를 보며 웃던 선미의 풋풋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찍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자주 찾던 곳이어서일까. 그들의 즐거운 모습에 친구들과 어울려 웃던 시절이 오버랩되며 괜히 뭉클해졌다. 채석강은 바닷물에 침식돼 퇴적한 절벽이 마치 차곡차곡 쌓인 책장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옆으로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다. 요즘 SNS에서 핫한 지도 모양의 해식동굴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채석강을 찾았다면, 노을이 뉘엿뉘엿 질 무렵 붉은빛과 보랏빛으로 물든 해식동굴에서 인생 사진을 찍어보라.
채석강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작당마을은 작은 어촌마을로, 부안 마실길의 한 코스이기도 하다. 이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갯벌에서 학수와 용대가 거칠게 싸우게 되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응원전. 마치 운동회에서 청군, 백군 나눠 응원하듯 학수 편과 용대 편으로 나눠 치열한 응원전을 펼친다. 마침내 싸움이 끝나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뜻밖의 변산초등학교 64회 동창회가 열린다. 치열한 몸싸움 끝에 오랜 응어리를 푼 학수와 용대가 나누는 대사는 상황은 다르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감정과 같았다. “아따 개운하다!”
/글·사진 최수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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