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채계산 평야 대형 논 그림 ‘웃는 여신(女神)’

살아서든 죽어서든 ‘살 맛’나는 순창
맑고 창성한 땅 순창.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순박하며, 인심이 후덕하다 했던 곳. 전라북도의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해 있으면서도 풍부한 농경지 덕에 삶이 윤택하고, 자연이 수려하여 살기 좋은 곳이라고 알려진 땅.

때문에 ‘생거순남(生居淳南) 사거임실(死居任實)’, 즉 살아서는 순창?남원이 좋고, 죽어서는 임실이 좋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생거장성(生居長城) 사거순창(死居淳昌)’이라는 말도 있다. 살아서는 장성이 좋고, 죽어서는 순창이 좋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순창은 ‘살아서 살기에 좋고, 죽어서 살기에도 좋은 곳’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순창에 가면 ‘살 맛’이 난다. 최근 채계산에 출렁다리가 놓이면서는 하루 1,500여 명이 방문하는 명품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길이 270m, 높이 90m의 이 산악현수교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장의 길이를 자랑하며 등산객과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인체 형상을 한 명산 채계산

사실 채계산(釵?山)은 해발 342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다. 그럼에도 회문산, 강천산과 더불어 순창의 3대 명산으로 불리며 순창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정상에서 보면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걸림 없이 조망할 수 있는데다, 이름 그대로 비녀를 꽂은 여인이 누워 달을 보며 창을 읊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의 형국이 인체를 닮은 산을 가장 좋은 명산으로 꼽는다. 산수(山水)의 정기가 뭉쳐 있으면서 자연의 생명력이 가장 왕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는 말처럼 인물은 지기를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지형에서는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다고 하였다.

섬진강변의 아슬한 칼바위와 송림이 어우러진 멋진 암릉이 설악산 용아장성(龍牙長城)의 축소판을 연상시킨다는 찬사까지 받고 있는 산. 기운이 이러하니 하나의 이름만으로는 양이 안 차는 것도 당연한 일. 채계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바위가 책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책여산(冊如山), 적성강을 품고 있어 적성산(赤城山), 흡사 꽃처럼 피어 있는 듯한 기묘한 바위들과 옹바위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하여 화산(華山) 또는 화산(花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산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과 구름 사이 아득하게 걸려 있는 출렁다리를 지나 칼바위 능선 따라 올라보면, 또 다른 장관이 기다리고 있다. 몇 천 년 동안 도저하게 흐르는 푸른 섬진강 물과 바둑판 같은 순창 들녘이 한눈에 잡아드는 것이다. 곳곳에 잔뜩 독을 품은 기세로 버티고 선 두꺼비바위들이 섬진강으로 향하고 있는 광경 또한 백미라 할 수 있다.

대형 논 그림으로 살아난 ‘웃는 여신’

무엇보다 최근 순창 들녘에서 웃음을 선사해주고 있는 ‘웃는 여신(女神)’의 고혹한 아름다움과 매력은 독특하고 남다르다. 7,000여 평의 논에 그려놓은 그림 면적만 해도 상당하기에 칼바위 부근까지 올라서야 비로소 여신의 그 신비한 웃음을 한눈에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벼가 자랄수록 색깔이 선명해져 소서(小暑) 절기에 접어든 지금은 여신이 제 모습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은가.

굽이치는 섬진강 줄기나 강천산 구장군폭포에서 나온 듯 풋풋함을 머금고 있는 저 여신의 수수하기만 한 웃음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어쩌면 채계산의 월하미인이 정말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만 같은 광경에 두 눈을 애써 비벼보게도 된다. 해맑은 여신의 웃음이 더위까지 시원하게 씻어주어 좀처럼 자리를 뜨기 싫은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터.

순창 출신 피터 오 작가

적성면 신월리 일대 채계산 평야를 이렇듯 대형 캔버스로 활용해 팝아트를 해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순창 출신의 피터 오(만42세) 팝아티스트. 적성면 대산리에서 농민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동심의 세계를 갈망하였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결속에 의해 사는 어른이 되기 싫었기에 미국 애니메이션 ?피터 팬(Peter Pan)?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 미워할 수 없는 생기발랄한 캐릴터들과 유머러스한 악역, 주인공 아이들의 감동적이면서도 유쾌한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그는 작가 명 또한 피터 팬에서 ‘피터(Peter)’를, 오형일이라는 자신의 이름자에서 ‘오’씨 성을 따다 붙여 ‘피터 오’라 하였다. 아이들의 동심세계에서 결코 늙지 않는 어른으로 마냥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무렵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뒤 음악 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클래식을 전공하여 전국 투어 독주회나 초청연주회, 대기업 광고 CF 메인 테마음악 작곡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전통서예와 문인화 등을 배우며 몸속에 녹아든 미술에 대한 열정은 그를 대중미술로 이끌었다. 예술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렵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2014년 대한민국 15인 현대미술 대표작가 중 대표 1인 팝아티스트로 선정되면서 그의 삶은 쉴 새 없이 바빠지게 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기념 연극 ?바보 햄릿? 타이틀 디자인이며 각종 크고 작은 콘서트 타이틀 디자인 비롯 대기업들과의 제품 콜라보레이션, 초대 전시 등. 그런 활동들은 그에게 대한민국 베스트 브랜드어워드 베스트 브랜드 대상을 거머쥐게 해주었다.

왕성한 활동이 독이 되었는지 몸이 안 좋아진 그는 결국 2017년 가을, 고향인 순창으로 돌아와야 했다. 외국에서 있을 전시나 다양한 문화예술 작업 등을 놓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3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순창에 와서도 순창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마음 놓고 쉴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순창의 청정한 자연과 눈 두는 곳마다 힐링이 되는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되돌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피터 팬처럼 하늘을 날아도 될 만큼 거뜬해진 것이다.

세계 유일‘벼 팝아트’

“벼(Rice) 팝아트(Pop Art)는 농업을 활용한 새로운 예술장르로 대한민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현대미술입니다. 기존의 일본식 논 그림에서 단순한 선 그림 작업을 발전시킨 것이지요. 벼 팝아트라는 명칭과 작업 형식도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라 예술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 벼를 이용한 대형 벼 팝아트는 탄생할 수 있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며, 또 일어날지도 모르는 무궁무진한 동심의 세계가 지금 순창 들녘에서 ‘웃는 여신’이나 ‘웃는 고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몇 날 동안 피터 오 작가의 그림 도안에 따라 손으로 직접 오색 벼를 심어 얻은 결과이다.

따분하고 재미없다고만 느껴지는 농촌에 흰색, 검정, 노랑, 빨강, 초록 등으로 그려진 대형 논 그림이라니,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일반벼 유전자 변이를 통해 벼 자체에서 다섯 가지 색이 나오도록 하여 그린 벼 그림.

가을이 되어 들판이 황금색으로 물든다 해도 저 벼들은 기존에 가지고 나온 색을 그대로 고수하여 추수를 할 때까지도 순창 들녘에 그려진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유색 쌀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색 벼가 나오지 않고 있어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나마 세계 유일 농촌 예술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밖에.

추수가 끝난 후에는 이 곳에서 나온 쌀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논 그림이 주는 관광 컨텐츠 효과는 물론 지역사회에 온정을 베풀어 ‘웃는 여신’의 진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니 일석이조인 셈. 채계산 출렁다리와 함께 순창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키워 나간다 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피터 오 작가는 이로써 갈수록 홀대받는 우리나라 농업이 사람들에게 먹거리는 물론 최고의 예술 관광자원이 될 수 있기를 또 갈망하고 있다. 하여 ‘농업’도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알려가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타 지역이나 세계 미술 컬렉터들에게도 많은 제안과 프러포즈를 받게 되었다.

삶이 윤택하고, 자연이 수려하여 살기 좋은 곳, 순창. 채계산 출렁다리에 농촌 예술 관광을 더 보태어 옛말 그대로 참 ‘살 맛’나는 고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서 살기에 좋고, 죽어서도 살기에 좋은 순창으로 말이다.
/글 사진 김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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