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건데 <8월의 크리스마스>는 흔히 말하는 ‘내 인생의 영화’는 아니었다. 아니, 보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 내 인생의 영화가 영화냐 물으면 보다 ‘있어 보이는’ 영화를 대곤 했다. 그런데 전라북도에서 촬영한 많고 많은 영화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심은하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살며시 미소 짓던 한석규의 모습이 몇날 며칠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쩔 도리 없이 어느새 개봉한 지 스무 해가 훌쩍 넘은,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영화를 만나러 떠났다.

영화의 주 배경인 정원의 일터 <초원사진관>을 비롯해 정원과 다림이 만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은 다름 아닌, 군산에서 촬영했다.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초원사진관>을 시작으로 정원과 다림의 발자취를 따라 서초등학교를 거쳐, 바로 옆 해망굴을 돌아보고 발걸음을 재촉해 동국사길까지 걸었다. 풋풋한 심은하도, 다정한 한석규도 없는 그 길을 홀로 걸으며 22년 영화를 오롯이 느껴보았다.

여전히 정원과 다림이 웃고 있는 <초원사진관>
영화 속 <초원사진관>은 정원이 아버지를 이어 운영하는 서울의 변두리 사진관으로 나온다.

단체사진 속 좋아하는 여학생 사진을 확대해 달라는 중학생들, 젊은 시절 사진을 복원해가는 아주머니, 왁자지껄 가족사진을 찍는 가족, 홀로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는 할머니까지. 저마다의 사연으로 작은 사진관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여기에 다림과 정원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영화의 주된 이야기가 그려지는 공간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군산의 역사를 바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진관으로 군산시 신창동 근대역사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본디 가발창고였던 이곳이 사진관으로 변신한 사연도 흥미롭다. 시나리오와 어울리는 사진관을 찾기 위해 전국 사진관을 돌던 감독이 잠시 쉬던 카페 건너편의 나무 그림자가 지는 차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단다. 그리고 세트는 절대 짓지 않겠다던 결심을 바꾸고 사진관을 짓게 된다.

사진관은 촬영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영화 속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면 영화 속에 등장한 의자와 카메라, 선풍기, 앨범, 괘종시계 등이 22년 전 영화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준다.

잘못 찍어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보고 정원의 잘못이라 우기는 다림, 한낮의 내리쬐는 땡볕을 피해 사진관으로 들어와 여름이 싫다고 투덜거리는 다림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사진관 내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보니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 달라는 다림의 당돌한 요구에 빙그레 웃으며 넣어주는 정원처럼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정원이 속마음을 내비친 서초등학교와 해망굴
아무리 무던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 앞에서 온전히 평온할 수 있을까.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정원 역시 무덤덤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꽁꽁 숨긴 채 그저 아무 일도 없는 양 나직하게 말하고, 살며시 입 꼬리를 올리며 웃음 짓곤 했다. 그러다 본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날,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살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고 싶은 날이면 이곳을 찾았다. 서초등학교와 해망굴 일대가 바로 그곳이다.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했다.”

텅 빈 운동장에 서니 나지막한 정원의 중얼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장난치는 아이들 옆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던 정원처럼 타이어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비록 지금은 영화 속과 달리 운동장 정면이 아닌, 측면을 바라보게 되어 있지만 그 위치가 무슨 상관이랴. 담장 역시 허물어지고 건물도 새롭게 바뀌었지만 그것 역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빨강, 노랑, 파랑 알록달록한 바람개비 옆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장소라는 안내판이 친절히 이곳이 과거 영화 촬영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다림과 정원이 만나는 장면은 해망굴 주변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해망굴은 군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과 군산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1926년 개통된 터널이다. 해망굴 왼편으로 월명공원 입구가 있는데 그 바로 아래는 다림이 휴식을 취하던 장소다. 당시만 해도 나무가 무성했던 그곳은 현재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첫사랑과의 어색한 만남, 동국사길
서초등학교를 나와 다시 초원사진관을 지나 10분가량 걸으면 나오는 동국사길. 이 길은 정원이 첫사랑 지원과 어색하게 해후하는 곳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정원의 씁쓸한 독백이 들리는 듯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쓸쓸한 길이 아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길을 꾸미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문을 열면서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동국사길이라는 이름은 이 길에 자리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에서 유래되었다. 동국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마디로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그저 그런 흔해빠진 사랑 이야기라는 설명은 부족하기 그지없다.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닌 느낌마저 든다. 무더운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남자 정원(한석규 분)의 일상에 주차관리원 다림(심은하 분)이 들어오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느리고 깊게 촬영지를 다녀오니 왜 이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그 풍경은 변했지만, 그 감성만은 여전한 그곳에서 어렴풋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저 사랑 영화가 아닌, 삶의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아내고, 새로운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 깊이 남아 있었던 게다.

글·사진 최수진 자유기고가
<사진 설명>

1. 여전히 많은 이들이 추억을 만들고 있는 <초원사진관>

2. 영화 속 정원의 속마음을 내비친 서초등학교

3. 해망굴

4. 정원이 첫사랑과 어색한 이야기를 나눈 동국사길

5.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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