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의 봄. 40년 전 대한민국에서 잊지 못할 민주화의 봄이 왔던 그 시절의 그 날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잊지 못할 ‘기억의 날’이다. 5.18 민주유공자 양영두씨에게 있어 1980년 5월 18일은 ‘아픔의 시작’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광주민주항쟁이 발생한 소식을 듣고, 10일이 지난 28일 그곳을 향해 길을 떠났다. 당시 10대 국회에 비서관으로 있던 양씨는 광주의 참혹한 진실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 외교관, 언론인 등과 함께 비밀리에 광주를 찾은 것이다. 이들은 신군부의 계엄 발표로 통제된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언론은 물론 모든 것이 통제된 광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많은 고생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당시 계림동에 거주하는 정운본씨의 도움을 받아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양씨 일행은 맞이한 것은 ‘광주의 참혹함’이었다.

광주의 거리는 민주항쟁이 발생하고 10여일이 지났지만 그날의 참혹한 상황을 기억하기라도 하듯이 찢어진 옷가지와 벗겨진 신발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거리를 떠나지 않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적막한 거리에는 민주항쟁 이후 사라진 자식과 남편을 찾기 위해 나선 부녀자들의 울음소리만 들여왔다. “당시 신군부는 시민군들의 시신을 도청에 모아두고 모든 상황을 통제했다. 그 곳의 모습을 보고 ‘과연 이게 대한민국 안에서 일어난 것인지 눈의 의심할 정도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도청 입구에서 50여명의 경찰과 계엄군은 직계로 확인된 사람이 아니면 출입도 막고, 전국 각지에서 피붙이를 찾으러 온 가족들에게 시신조차 인도하지 않아 장례조차 치룰 수 없게 했던 것.

양영두씨는 이 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광주시민군 관계자와, 전남대 송기숙 교수, 홍남순 인권변호사 가족 들을 만나 ‘5월 18일 광주의 그날’의 일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현장조사는 다음날인 30일, 끝을 맺게 된다. 29일 밤 양씨는 서울에 있던 가족들이 걱정돼 전화를 걸었던 수화기 넘어로 수사관들의 목소리와 아내의 “당신 수배됐으니 얼른 피하라”는 말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들은 전국에 수배돼 광주를 도망치듯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 수배된 그는 2달간의 도피 끝에 부산에서 501보안대에 붙잡혀 20여일간의 모진 고문을 받아,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등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양 씨는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비하면 한 없이 부끄럽지만, 당시 그 현장을 찾아 그들의 행동과 의지, 역사를 알릴 수 있어 다행이다”며 “제대로 된 5.18민주항쟁을 알림으로써 민주주의는 수많은 시민들의 피로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다시는 왜곡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김용기자·km4966@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