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욱 국민연금공단

 

일 년 만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난건 아내의 식당 개업식이었다. 내가 보낸 단체문자를 보았다며 아침 일찍 찾아왔다. 무척 반가웠지만 손수 초대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별것 아닌데 초대까지 해서 부끄럽기도 했다. 그 동안 연락이 닿지 이유가 무척 궁금하였으나 아침부터 술을 마실 수가 없어 저녁에 다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소주한잔’이 고마운 이유를 들려주었다.
 그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인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제주도 한림항에서 10분 정도 배를 타면 도착하는 작은 섬 비양도에서였다. 비양도에서 멀리 보이던 한림마을의 은은한 불빛은 아름다웠다. 최고층 라운지 레스토랑에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분위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라도 번잡한 도시를 떠나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섬 전체가 잠이 들어 고요한데 작은 불빛 한두 개가 아슴푸레 섬을 비추고 있었다. 
 어촌마을 주민들은 내일 새벽 어로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들을 피해 인적이 뜸한 부두가 정자에 앉았다. 적당한 어둠이 어울려 섬 밖 도시의 야경이 옅은 노을처럼 비친다. 간간이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소주잔을 기울였다. 마음 맞는 이와 대화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민을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친구와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게 살다보니 섬 여행의 감흥도 점차 잊혀져갔다.
 문득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여 연락하였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 통화가 되지 않아 문자를 보냈으나 답장은 없었다. 반가운 목소리로 “그래 소주한잔 하자”라고 말할 것 같았던 친구는 한 동안 연락이 끊겼다. 걱정도 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소식이 없어도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자들의 우정이란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소주한잔 들이키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친구가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방황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산간오지에 틀어 박혀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삶이 힘들어 극단적인 생각도 수차례 했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소주한잔’ 때문이라며 해맑게 웃었다.
 하루는 모질게 마음먹고 약도 준비했었는데 소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푹 자고 나니 이상하게 번뇌가 사라졌다고 한다. 소주한잔에 얽힌 추억을 떠 올리다 보니 사람들이 보고 싶고 소중한 이들을 생각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다. 친구는 농담처럼 소주한잔 이야기를 툭 던졌지만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나는 듣는 내내 정말 미안했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나긴 시간을 어떤 심정으로 견뎌냈을까. 몇 번의 통화와 문자 외에는 관심이 없던 나 때문에 더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친구의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라 좀 더 신경 써서 지켜보라는 신호였던 것 같다. 건강하게 돌아와 준 그가 너무 고마워서 소주 한잔 가득 따라주었다.
 그 날 ‘비양도’의 야경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불빛의 은은함이나 색깔이 아니라 친구와 오고갔던 술잔과 나누웠던 대화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친구와 어린 시절 추억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2교시가 끝나면 꺼내먹었던 도시락 속 짭조름한 멸치볶음, 야간 자율학습에 병원에 간다고 둘러대고 놀러갔던 일, 두근거림으로 함께 했던 첫 미팅, 담배 피다 걸려서 어깨동무하고 쪼그려 뛰기 했던 기억을 이야기하며 많이 웃었다.
 다시 술을 한잔 권했다. 친구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잔잔한 미소가 비양도에서 본 한림마을의 은은한 불빛을 닮았다. 친구를 보면서 이해인 수녀님의 ‘어느 날의 커피’ 라는 시의 문구가 떠올랐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모두가 아니었다.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시인의 마음을 닮은 친구가 다시는 외롭지 않도록 자주 연락해야겠다. 오늘 소주한잔은 아주 달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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