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록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10여 년이 지난일이다. 당시 다니던 직장에 새로 부임한 예술감독은 자기사람을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식 공채를 통해서 채용해야한다는 의견에 예술감독은 특채를 해야 하겠다며 회의석상에서 한마디 던졌다.
  “예술감독에게 전권이 있는 게 아닌가?”
  “전권은 대통령에게도 없습니다.”
  “뭐!”
  “...”
  예상하셨겠지만 새로운 예술감독의 얼굴이 뻘게지면서 회의는 빨리 끝났다. 민간극단의 수장이었던 신임 예술감독은 같이 일하던 사람 하나를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결국은 공공예술단체는 엄격한 공채를 통해 정규직을 채용해야한다는 것을 인정한 예술감독이 의견을 철회함으로써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섭섭했던 것은 극단의 선임자이었던 여러 선배였던 분들이 ‘예술감독이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고 바람을 잡고, 공개석상에서도 주장함으로써 예술감독의 귀와 눈을 막은 적이 있었다. 어떤 선배는 배역에, 어떤 선배는 예술감독이 지명하는 직책에 관심을 가져서 그런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했다. 대부분의 단원도 침묵했다. 혹시나 자신에게 올지도 모르는 이유 없는 불이익을 미리 걱정해서였을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상명하달이 예술단체 카리스마의 근본이었다. 지도부가 결정하면 단원들은 군소리 없이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유난히 예술계가 선후배를 많이 따지고 서열을 중시하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인 집단인 것에 반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예술계가 미투 이후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상명하달에서 하의상달로 소통의 구조가 바뀌고 있고, 바뀌어야 하는 것이 시대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예술단체에서 직책단원과 선배단원들의 역할은 창작과 운영에 관한 단원들의 의견을 잘 아울러서 예술감독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
  예술창작과정에서의 의견 소통과 잡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소리로, 언어로, 몸으로 표현하는 집단 무대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개개인의 역량과 능력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누구는 어떤 역을 시켜도 잘하고, 누구는 특정한 부분만 잘하고, 누구는 아쉬운 게 많은 것이 예술창작 과정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훌륭한 예술감독이라면 잘하는 이를 잘하게 보이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도 그에 맞는 역을 만들어주고 뛰어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 잘하는 이들은 불만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예술감독의 ‘예술독재’가 필요하다. 최종적인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는 예술감독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최우선의 방법은 아니래도 창작과정의 문제 해결책으로 ‘예술독재’를 인정한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모든 집단이 모인 활동은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지만 예술창작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술독재’가  유일하다.
  창작의 과정 속에서 ‘예술독재’가 인정되는 만큼 단체운영과 관련해서는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 그리고 정해놓은 규정을 지키는 것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직책단원과 선배들의 역할이다. 개인의 이익을 생각해서 말 못하는 선배는 선배가 아니고, 선임자가 아니고, 직책단원이 아니다. 그래서 그 예전 회의가 끝나고 술자리에서 화가 난 후배가 술잔을 던지면 하던 말이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선배님들! 밥값 좀 하세요.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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