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로 국민연금공단 고객지원실
 

 

하루세끼 식사를 하는 즐거움은 시대를 뛰어 넘어 현재 진행형이다. 세끼의 식사 중에서 즐거움은 점심이 으뜸이다. 그것도 식당의 밥보다는 도시락이 최고이다.
 도시락하면 떠오르는 것은 초등학교 점심시간이다. 보온도시락이 없던 시절이라 보온을 위해 추운 겨울에는 교실 중간에 있는 난로를 이용했다. 난로 위에 양은도시락을 칸칸이 쌓아 두었다가, 오전 수업이 끝나면 시커멓게 그을린 도시락으로 따뜻한 밥을 먹었다. 쌀이 부족하여 정부에서 혼분식 장려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이었다.
 혼분식 장려를 위해 담임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락 검사를 했다. 도시락에 보리밥이나 감자, 고구마가 섞여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남들은 도시락 검사를 하는 날에는 쌀밥에 보리밥을 섞었는데, 집안이 가난했던 나는 보리밥에 쌀밥을 섞었다. 학교에서 도시락 검사를 하는 날에는 어머니가 장남인 나의 자존심을 위해 쌀밥을 조금 도시락에 위쪽에 올려 주었다. 덕분에 도시락 검사를 하는 날에는 보리밥 위에 있는 쌀밥을 조금이나마 먹을 수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통학을 했다. 집이 산골이라 학교까지 십리 길이었다. 당연히 도시락은 필수항목이었다. 자전거로 통학을 했다. 요즘 같이 도로 사정이 좋으면 자전거라도 승용차 못지않게 승차감이 있어 신나게 달릴 수 있었겠지만, 비포장 신작로는 자갈밭길이라 울퉁불퉁하고 패어진 곳이 많아 비가 오면 교복이 흙탕물로 뒤범벅되는 날이 많았다. 또한 밀폐가 잘 되지 않는 양은도시락이 흔들리면서 반찬 국물이 국어 교과서 몇 페이지를 붉게 물들이곤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도시락을 직접 준비를 했다. 부모님 곁을 떠나 학교 인근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했다. 밥은 어떻게 할 수 있었지만 반찬이 문제였다. 야간자율학습까지 하고 나면 몸이 파김치가 되어 도시락 반찬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반찬 만드는 재주도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다. 당시 냉장고가 없어 여름철이면 마른반찬을 제외한 다른 반찬은 2.3일만 지나면 먹지 못해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반찬 없이 밥만 넣은 도시락을 가져갔다. 피가 끓는 청춘이라서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밥만 먹어도 맛이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1교시 수업이 끝나면서부터 쉬는 시간마다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그 시절의 반찬 중 으뜸은 분홍빛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였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친구들이 도시락 반찬으로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를 가져왔다. 성격이 온순했던 부잣집 한 친구는 계란 후라이를 다른 친구에게 빼앗기자 비책으로 계란 후라이를 반찬통에 담아오지 않고 밥을 담은 도시락 바닥에 숨겨와 도시락을 뒤집어서 먹던 웃지 못 할 추억도 있다.
 사회초년생 시절에도 자취생활을 했다. 그때는 회사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가끔 밥을 해 먹곤 했다. 그러다가 이십대 후반에 운 좋게 결혼을 하여 긴 자취생활을 마감 할 수 있었다. 나의 입장에서 신혼의 단꿈 중에 제일 좋은 것은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준비하는 해방감을 느껴 좋았다.
 신혼시절 짧은 얼마 동안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아내 덕분에 맛깔스러운 점심 도시락을 먹을 수 있어 너무 행복했었다. 아내에게 도시락 혜택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가 육아전쟁이 돌입한 후부터는 저녁 한 끼 조차도 얻어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 둘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 외벌이로서 한 푼이라도 아낄 묘책으로 점심 도시락을 아내에게 어렵게 제안하여 몇 달을 행복하게 보냈다. 그러던 중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도시락 가방을 택시에 두고 오는 바람에 더 이상 나에게는 도시락이라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인생 후반전을 맞이하고 있는 50대 초반의 지금, 주마등처럼 나와 함께한 그리운 도시락들이 기억 속에서 펼쳐진다. 다시 못 올 추억의 도시락을 되새기면서 은퇴 후 요리학원에서 맛깔스런 퓨전요리를 배우련다. 내가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아내와 가까운 공원이라도 가서 도시락의 추억을 이야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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