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록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적으면 수 십 마리에서 많으면 수 백 마리가 되는 양을 치는 일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 유목 또는 방목을 하는 지역에서는 많은 문학작품과 우화, 그리고 옛날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속담에서도 ‘양의 탈을 쓴 늑대’ 등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예술단체의 운영은 양떼를 방목하는 일과 같다. 민간예술단체도 마찬가지겠지만 공립예술단체의 경우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우선 양의 특성을 보자. 양들은 고집이 세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기도 잘하고, 완벽하게 전체가 하나 되어 움직여 일사불란하다고 할 정도로 움직인다. 하지만 개인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리지어 움직일 때도 항상 자기 목소리들을 낸다. 계속 여기저기서 ‘메~에’하고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오에서 멀어지거나 하지 않고, 리더나 전체의 움직임에 내 몸을 맡긴다. 자기 소리는 있되 과하지 않고, 조직 전체와 같이 하려는 사회성을 보인다. 실제로 공립예술단체의 단원들은 모두 낭중지추와 같은 기량을 가지고 있지만 조직과 단체를 위해서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자기를 낮추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적인 역량에서는 항상 노력하고 자기 색깔을 갖으려고 한다. 실제로 공공예술단체에서는 결정하기까지가 힘들지 막상 결정되면 군소리 없이 따르는 특성이 있다. 결국 그 책임은 리더가 지는 것이다.
  와치독이라고 부르는 양치기 개가 있다. 양은 아니지만 계속 양들을 주시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와치독의 효과는 방목일 경우 더욱 특별한 능력을 보인다. 와치독 한 마리가 수백 마리의 양들이 일정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하며, 안전하게 풀을 뜯게 하는 것이 능력이다. 이 와치독은 양의 무리를 끌고 가지 않는다. 전쟁터처럼 ‘나를 따르라’하고 앞으로 뛰어 나갈 경우 양들은 모두 흩어질 수도 있다. 양들을 앞으로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계속 U자 형태로 왔다갔다하며 계속 뛰어다녀야 한다. 땀이 나지 않는 와치독이지만 정말 땀나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짖기도 하고,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목덜미를 물어 무리 안으로 집어넣기도 한다. 
  대부분은 아니지만 일부 문제적 인간, 일부 양치기소년이 있다. 동물처럼 충실하지 않은 것이 인간인지라 모든 것을 개에게 맡겨 놓고, 꿀따러 다니고, 장난치고, 서리를 다닌다가는 사고가 나면 애먼 양치기개에게 화풀이하기도 한다. 게다가 심심하면 ‘늑대가 나타났다’고 마을사람들에게 장난을 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보여주느라고 급급하다.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고 썩은 미소를 날리고, 개와 양들은 어리둥절 한다. 게다가 문제적 인간! 양치기소년은 전문성도 없어서 양들의 마음이나 개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 아니면 말고 하는 방식으로 양들을 본다. 본인 전생에 양이었는지, 개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나만 지금 내가 양치기소년이라는 현실만 본다.
  예술단체의 운영자들은 본인들이 와치독일 수도 있고, 양치기소년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을 선택하건 그것은 자유다. 특히 민간예술단체라면 더욱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공공예술단체의 책임자라면 본인이 와치독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양치기소년의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여야 한다. 현재 공공예술단체의 책임자들은 공채를 통한 임기제이므로 임기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와치독을 선택하건 양치기소년을 선택하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양들의 침묵이다. 양들이 ‘메~에! 메~에’ 하고 울 때는 건전한 조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양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는 무엇인가 내부적인 뜨거운 변화가 준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심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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