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협동조합 역사는 유럽의 협동조합 역사에 비하면 이제 태동기를 지나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은 짧은 역사 속에서도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70년 전, 참혹한 한국전쟁 가운데 60%가 넘는 고금리를 요구하던 사채업자들로부터 고난을 겪던 서민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이라고 생각한 파란 눈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같은 뜻을 가진 신도들의 손을 잡고 협동조합을 꾸렸다. 그것이 지금의 신용협동조합의 씨앗이 됐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뿌린 씨앗은 이제 세계 신협규모 1위라는 꽃을 한국에 피워냈다. 그리고 전북의 71개 조합 역시 낮은 곳에서 서민들에게 든든한 금융 울타리 역할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올해는 '자주·자립·협동' 신협이 한국에 태동한지 60년이 되는 해다. 이에따라 본보는 전북에 자리한 신협 조합을 찾아 그간 걸어온 60년과, 앞으로 걸어갈 100년의 이야기를 담아보기로 했다. /편집자주

전주삼천신협(상임이사장 최태일)은 최근 삼천동 우림성당 옆 신축건물로 새 터전을 옮겼다. 지난해 2년 연속 신협중앙회 전북지부 종합경영평가 경영대상을 거머쥔 것에 이어 신축건물로 새 터전을 잡으며 겹경사를 맞이한 것이다.
소상공인들과 서민들의 든든한 금융 동반자가 되기 위해 1993년 파티마신협에서 전국 최초로 분리된 삼천신협은 발기인 18명, 출자금 65만 762원으로 설립의 근간을 다졌다.
당시 재무부장관의 인가서를 받아 삼천동에 뿌리 내린 삼천신협은 꼼꼼한 조합원 관리와 건실한 재무실적을 바탕으로 작지만 강한 조합으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8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 위기는 삼천신협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했다. 최선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 2001년, 조합원들에게 출자 배당금조차 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재무건전성에 흠집이 가자 조합의 합병 및 폐쇄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 당시를 기억하는 최태일 이사장은 "정말 힘든시기였다. 합병도 폐쇄도 결코 답이될 수 없었다"며 "무엇보다 믿고 맡겨주신 조합원들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반으로 바로서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재무조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무너지지 않는 탑을 쌓아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재무조합상태를 벗어났다. 무려 16년이나 걸린 일이었다.
최 이사장은 조합원들에게 16년 동안이나 출자 배당금을 주지 못했던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이사장실 옆 벽면에 역사관을 빼곡히 기록해 새겨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듯 역사를 잊은 조합 역시 미래가 없을 것임을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재정건전성을 회복한 삼천신협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신협중앙회 전북지부 종합경영성과평가에선 경영우수상 1회, 경영최우수상 5회, 그리고 경영대상은 3회나 차지하며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신협중앙회 종합경영성과평가에서도 2018년 전북 최초로 전국 4위를 기록하며 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지난해엔 전국5위로 2년 연속 우수상을 차지했다.
전국 883개 조합 중 삼천신협이 차지한 4~5등의 기록은 16년간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증표였다.
최 이사장은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조합원들과 함께 조합원들의 소중한 자금을 지켜온 임직원들의 노력 덕이라며 공을 돌렸다.
"16년의 세월동안 굳건히 한 자리를 지켜온 상무와 차장들의 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영광은 손에 쥐지도 못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 오랜 세월동안 배당을 받지 못했음에도 한결같이 삼천신협과 고된 길을 걸어준 조합원 분들이 없었다면 삼천신협도 없었을 겁니다. 이제는 정말 고난의 파고를 함께 넘어 온 동지같은 느낌입니다."
태동부터 좌절, 그리고 재기까지 지켜봐 온 29년차 윤형식 전무는 "이제는 신협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서 조합원과 임직원들에게 실질적인 복지를 베풀고 싶다"며 향후 목표를 밝혔다.
올해는 신협이 창립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삼천신협 역시 60주년을 맞는 각오가 남다른 상황.
최 이사장은 "삼천신협은 처음 시작했던 마음, 즉 서민들의 금융으로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부분에 방점을 찍을 계획이다"며 "조합원과 상생하며 지역민들을 어부바하는 금융기관이자 협동조합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신축건물로 이전을 하면서 가장 신경쓰고 있는 계획은 조합원을 비롯해 지역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문화센터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특히 오랜 기간 삼천신협에 애정을 가지고 함께 지켜봐준 장년층 이상의 조합원들이 누릴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으로 문화센터를 채우고 싶다는 뜻을 밝힌 최 이사장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꾸준하고 실질적인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할 계획이다"며 "산악회를 비롯해 테마여행, 트래킹 등도 구상중에 있다"고 말했다.
서민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신협인 만큼, 여전히 은행 문턱이 높게만 느껴지는 지역민들을 위해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삼천신협을 구상중인 최 이사장.
그는 "신협은 조합원들의 소중한 출자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인 만큼 조합원들의 정성을 소중히 생각하고, 힘든 이웃들을 어부바 해주면서 쓰러지면 붙잡아주는 따뜻한 은행이 되고 싶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2020년 1월 기준으로 자산 1,490억 원, 조합원 수 9,604명에 이르는 중견급 조합으로 성장한 삼천신협은 다음 성장의 동반자 역시 결국은 '조합원'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최 이사장은 "삼천신협의 존립 근간은 결국 조합원입니다. 조합원이 없는 조합은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삼천신협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보내주셨던 성원만큼 믿어주신다면 떠나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신협이 되겠다는 약속을 경영자로서 감히 약속드린다"고 답했다.
마무리 하며 나오면서 바라본 삼천신협 이사장실 벽면엔 서산대사가 남긴 한시(韓詩)가 유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덮인 들판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은 뒤따라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여느 지점보다 어려움도, 고난도 많았던 전주삼천신협이 걸어가고 있는 발자취가 지역민의 금융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발자취로 기억되길 바라본다. /홍민희기자·minihong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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