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4·19혁명 60주년이다. 4·19혁명은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역사상 최초의 승리로 기억되며 국민의 참여와 노력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4·19혁명의 시작은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였다. 전북대는 전국 대학교 가운데 가장 먼저 시위를 시작한 학교다. 이와 관련 전북연구원은 최근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 전라북도-청년 4·19의 시작’ 브리핑을 통해 4·19혁명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위상을 밝혀 동학부터 촛불까지 이어지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전북임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4 의거 전개와 의미
  ‘민주학원 건설에 매진·4월 학생 혁명!’ <전북대학교보>(77호·1960년 5월 13일) 1면 헤드라인이다.
  신문 전면이 4월 혁명에 대한 기사다. 사설은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시작됐다며 “제2공화국의 번영이 학생들의 흘린 피로써 약속됐다”고 평가했다. 사설은 “4월의 자유 민주 학생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주혁명의 금자탑이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신석정 시인의 “민주혁명의 깃발은 나부낀다”로 끝을 맺는 ‘4월 혁명에 부치는 노래’도 게재돼 있다.
  중간에는 ‘덕진원두의 민주봉화, 불의 부정과 대결해서 승리했다’는 제목 아래 신학기 초 3.15 부정선거 이후 사복경찰 20여 명이 학교 요소에 배치돼 학생들의 동태를 살핀 내용부터 4월 6일 중고교 개학에 맞춘 거사 계획, 4월 15일 모의 학생 검거 상황 등을 기사로 실었다.
  전북연구원 브리핑에 따르면 4.4의거는 1960년 4월 4일 전북대 개강일에 정치학과 3학년 전대열, 황춘택 등을 주축으로 이승만 독재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였다. 전북이 동학혁명의 발상지라는 사실과 3·1 만세사건과 6·10 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등 선열 들의 뒤를 이어 궐기한다는 취지의 내용의 민주선언문을 작성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지는 않다.
  당시 700여 명의 학생들이 “자유당 독재정치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규탄한다!”등의 구호를 외쳤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들에게 교문을 봉쇄당하고, 주동자 7~8명이 연행됐다.
  데모는 경찰에 봉쇄됐지만 당시 지방신문에 기사가 실리며 4·4의거의 전말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전북대학교보>(77호) 4면에는 당시 급박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영문과 2학년 김소영 학생의 일기가 실렸다.
  “4월 4일. 신학기가 되어서인지 남학우들만 나와 있고 여학우라곤 나와 H 그리고 등(藤)뿐이다. 오늘따라 학우들의 오가는 시선들이 심상치가 않다. 매일 교내엔 얼굴에서 개기름이 흐르는 형사들이 대여섯 명이나 붙어 살면서 남학우들을 못살게 굴어서만도 아닌가 보다. 아침 아홉시 반 남학우가 쫓아와 중정(中庭)에 집합하고자 한다. 눈치를 살피는 품으로 보아 ‘무슨 일났고나!’하는 생각이 번듯 들었다. 중정엔 사백여 명의 학우들이 모여 있었다. 게시판엔 변동이 심한 시간표가 붙어 있긴 하지만 수업은 정상화하기 어려운 모양 같다. 무심히 바라다뵌 이 정경에 낯선 얼굴들이 총총이 섞여있다. 분명히 경찰이다. 학원도 자유로히 출입할 수 있는 특수계급들이다. 주위도 정복을 입고 총을 가진 경찰이 꽉차있다. 전북대생의 첫 ‘데모’를 막기 위해서다. 정의앞에 난무하는 힘과힘 권력과 권력… 교수들은 ‘진정하라’고 하는덴 기성다웠지만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게 하는 우리의 둘레를 이해 못하나 보다.”
  4·4의거는 봉쇄됐지만 참여한 학생들은 4·19시위를 주도했다. 4월 20일 오전 11시쯤 전북대 법정대생을 중심으로 약 600~700명 가량이 전주 시내로 진출했다. 전대열, 이현기 등은 전주 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들과 교감하여 신흥고, 상업고, 공업고, 전주고, 전주사범 등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전북대생과 각 고등학생, 일반시민이 합류하여 구호를 외치면서 도청 광장까지 행진했다.
  전북대 학생들의 4·4의거가 당시 대학 최초의 시위라는 사실은 생각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단체와 대학의 기록에서 관련 사실을 찾을 수 있다.
  △4월 4일 전북대생 3백여 명이 대학생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데모를 하다고 기술(<4월민주혁명사>(제3세대, 1992, 178쪽) △4월 4일 전북대생 3백여 명이 전주 시내를 누비며 이승만의 실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다(<호남 4·19삼십년사>(삼화문화사, 1995, 157쪽) △4월 4일 전주, 전북대생 3백명이 대학생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데모를 하다(<동국 대학교 4·19 혁명사>(클로바, 2003, 329쪽) △당시 본교 학생들이 서울의 학생들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워 대대적으로 활동하지 못하여도 4·19혁명의 효시가 되는 전북대생의 데모는 고려대학교의 4·18학생데모보다 14일 앞선 4월 4일에 전대열(정치,3)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나 곧 바로 진압되었다.(<전북대학교60년사>(전북대학교, 2007, 131~132쪽)
  당시 의거를 주도했던 전대열은 지난 2001년 4월 16일자 전북대 신문에 ‘동문이 밝히는 4·4시위의 진실’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전북대 의거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실을 토로한 바 있다.
  “역사는 4·18 고대 데모를 대학생 데모의 효시로 기록하고 있다. 전북대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이제 와서 고대와 앞뒤를 다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역사상 엄연한 사실이 왜곡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4.4 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전북도는 4.4 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국가기념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주관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날로 해당 사건의 품격을 높여주는 공식적 행사다.
  2010년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산의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각 지역에서 관심을 가졌다. 대구는 최초의 민주운동, 대전은 3·15의거와 4·19혁명을 촉발시켰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국가기념일로 추진하여 각각 2018년 2월과 11월에 제정했다.
  이외 각 지자체는 자신의 지역에서 일어난 날짜와 연계하여 국가기념일, 시 기념일, 관련 행사 등을 진행하거나 계획하고 있다.
  광주는 광주의 3·15의거가 마산보다 3시간 앞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점을 강조하여 4·19혁명의 첫 진원지라며 재조명 천명(매년 3·15의거 기념포럼)하고 창원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4·11이 4월 혁명의 시작일이라며 창원시 기념일 추진 중이다. 서울 강북구는 각종 관련 행사 진행과 함께 4·19사거리를 도시재생활성화 지역으로 선정하여 사업 추진하고 있다.
  4 .4 의거가 중요성한 이유는 전북이 민주주의의 뿌리임을 입증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4·19혁명 과정에서 전북의 역할 재조명을 통해 전북이 동학농민혁명(1894년)-3·1운동(1919년)-4·19혁명(1960년)-5·18민주화운동(1980년)-6월 민주항쟁(1987년)-촛불혁명(2016년~2017년)으로 계승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임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4.4 의거를 집중 조명한 전북연구원 박정민 박사는 4·19혁명에서 전북도의 역할을 홍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추진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첫째,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한 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법률을 개정해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도록 여러 분야에서의 노력해야 할 것. 둘째, 4·19혁명 관련 대학 최초 시위인 전북대 4·4의거의 위상을 재정립하도록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해 도내외의 관심을 환기해야 할 것. 셋째,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전북대 4·4의거 등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전북도가 4·19혁명 당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리는 여러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정민 박사는 “궁극적으로‘민주주의의 뿌리 전라북도’라는 브랜드 형성을 통해 도민의 자존감을 제고해야 한다”며 “4·19혁명에서 전북도의 역할을 조명하면 그 연원인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4대 민주혁명 중 하나로 제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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