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오피니언l승인2020.01.08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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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국민연금공단
 
 
인사발령이 나서 자리를 정리했다. 다음 주 부임할 후임자을 위해 모두 정리를 해야 한다. 책상서랍에 있는 소지품을 박스에 담아 책상을 비웠다. 마지막 서랍을 정리하다가 명함을 발견했다.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구석에 몇 장이 남아 있었다. 휴지통에 버리려다 명함을 보았다. 내 명함이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에는 회사의 마크와 소속과 직책, 그리고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또렷이 적혀있다. 이 명함에서 내 소속과 직책을 지우면 어떻게 될까. 명함이란 옷을 벗어 버린 자연인 내 모습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직장생활 30년 동안 내내 명함이 있었다. 부서를 옮기거나 직책을 달리할 때마다 명함을 만들었다. 손꼽아 보니 이번에 만드는 명함이 20번째 정도 된다. 우리 사회에서 명함은 신분증 아니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다. 가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유명한 벤처회사 직원의 명함을 받으면, 그 사람의 인품을 보기도 전에 먼저 판단을 하고 존중을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과거까지도 훌륭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 역시 내 명함을 보고 그렇게 나를 판단했을 것이다.
첫아이가 취직이 되었다. 학원 수학강사로 입사를 했다. 규모가 큰 학원이라 첫아이에게 신분증과 명함을 직장에서 만들어주었다. 첫아이는 취직이 된 기념으로 카톡으로 명함과 신분증 사진을 보내주었다. 봉급을 받는 것도 기쁘지만, 명함이 있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입사 초기, 첫아이는 신분증을 목에 걸고 찍은 사진과 명함을 각종 커뮤니티 대문에 걸어 두기도 했다. 나 역시 첫아이가 명함이란 새로운 옷을 입고 기뻐하는 사진을 보니 흐뭇했다.
며칠 전, 퇴직한 전 직장 동료 부부가 방문을 했다. 30년 전 직장생활을 시작할 당시에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직원이다. 국민연금 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어떻게 하면 연금을 많이 받을 수 있는지 언제 받아야 하는지 궁금해 했다. 60세 퇴직 후에도 계속 납부하다가 나이가 되어 노령연금을 받도록 안내를 했다.
퇴직한 그 직원은 아쉬운 것이 명함이라고 했다. 지인을 만나거나 자녀 결혼 상견례때 건네 줄 명함이 없어 아쉽다는 것이다. 허기야 30년 이상 사람을 만날 때 명함을 내민 것이 습관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소속과 직책이 없는 게, 자신의 신분이 없어진 것 같다고 한다. 유명회사 간부도 하루 아침에 동네 아저씨가 된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자연인을 평가하지 않고 명함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을 알기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문자가 왔다. 연말에 퇴직한 선배의 문자였다. 그는 실장, 본부장 등 중요 보직을 다 거쳤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열정과 성실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던 선배였다. 이번 인사이동을 축하하며 새로운 자리에서 열심히 하라는 격려 문자였다. 평소 따뜻한 마음으로 배려해 주었던 선배라 격려 문자가 더욱 고마웠다. 
퇴직한 두 직원을 보면서, 멀지 않는 시기에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의 명함은 무엇일까. 내 명함을 들고 생각을 해 보았다. 많은 선배 중에서 내가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명함에 적힌 직책이 후배들의 기억에 남는 명함은 아닐 것이다. 
명함, 평생 내 것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것이 아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명함은 비오는 날 잠시 가지고 다니는 우산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잠시 필요해서 쓰는 우산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오늘 내가 인사이동으로 지금의 명함을 버리고 새로운 명함을 새겨야겠지만, 그 명함도 영원한 명함이 될 수는 없다. 퇴근할 때 격려 문자를 보낸 선배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게 선배의 명함처럼 다가온다. 소속과 직책이란 옷이 벗겨진 뒤에 느껴지는 명함,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실한 명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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