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환 전라북도의회 의장

‘아~ 가슴이 답답하다. 나도 살기에 답답하고 정치가도 살기에 답답하고 그 밑의 하수인들도 살기에 답답하고 국민도 살기에 답답하다.’ 시인 최인경의 ‘가슴이 답답하다’의 싯구다.
신문이든 TV든 꽉 막힌 정치 관련 뉴스를 보고 들을 때마다 그렇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 그 중심에 국민이 있기나 한 것인지 묻고 싶다. 여야를 막론하고 사사건건 정쟁에 휘말려 ‘민생’은 내팽개친 정치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넘어 부끄럽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정쟁만 일삼는 정치 문화를 제발 그만두라”고 했다.
독일의 철혈 재상으로 불리는 비스마르크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 차선의 예술’이라고 했다. 정치는 ‘타협’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정치는 가능성이 아닌 불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은 원래 반대하는 정당이라지만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반대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들에게 국익이 존재하는지, 국민이 눈에 보이기나 한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여당도 설득과 차선을 도출해 내는 실력이 매끄럽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필자는 지금의 한국 정치를 보면서 ‘난세’란 어떤 세상인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세상, 계층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서로 불화하는 세상, 기득권층의 부도덕이 만연한 세상 등 많은 요소가 있을 것이다.
‘난세에 답하다’ 저자는 진짜 난세를 “믿음과 꿈, 그리고 희망과 이상을 잃고 정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시대”라고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힘을 모아 난관을 헤쳐나가면 바라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웃는 얼굴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꿈과 희망과 이상의 기반인 믿음을 상실한 상태다. 정치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난세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배운 정치학 교과서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으로 정의한다.
정치의 본질은 모두의 뜻을 모아 공공의 자산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행위다. 자원을 어떻게 분배해야 바람직한지, 그 우선순위에 따라 정책 방향을 조정하는 일이다.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역할을 잘할 사람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공정한 자원분배,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모습이 그 답을 준다. 자신도 그렇지만 정쟁의 대상들에게도 이러한 정치를 실천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선거법과 공수처 설치 등의 법안이 담긴 패스트트랙, 이에 맞선 야당의 필리버스터 맞대응 태세 등의 정쟁을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공정한 자원분배나 심판자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모들이 절규하는 민식이법 등 각종 민생법안은 물론 시도별 현안사업과 연관된 법률, 지방의회 역량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 등을 심의하고 처리하는 역할이 바로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치는 막말 정치, 혐오 유발 정치와 같은 구시대적인 정치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네 탓 공방 속에 국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정치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역사 실록에 2019년 한국 정치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각종 행사장에서 지역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말이 있다. “정치 이젠 지겹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느냐?”는 것이다. 국민이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정치 뉴스를 보면서 혀를 차는 게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태평성대를 꿈꿔 본다. 지도자는 국민을 하늘처럼 섬기고 국민은 지도자를 믿고 따라가는 그런 나라말이다. 교사는 학생을, 기업은 고객을, 공무원은 국민을 섬기는 그런 시대가 진정 태평성대가 아닐까? 같은 꿈을 꾸고, 상하가 교류되며, 인재들이 선발되고 소인배들은 퇴출당하는 세상을 꿈꿔 본다. 정치다운 정치, 국민에게 사랑받는 정치, 품격 있는 모습을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정치는 국민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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