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경찰의 과거사 청산’에서 ‘민갑룡 청장의 경찰 조직 내 권위적인 문화 개선’으로의 입장 전환으로 논란이 된 과거 친일행적 논란이 있는 전북지방경찰의 7명은 어떤 인물인가

6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전북경찰 초대 국장인 김응조씨는 1932년 만주 동북하얼빈교도학교에서 장교반을 수료한 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평텐에 설립한 봉천군관학교에 1935년 입학한 그는 만주국군 기병 소위로 임관해 국경감시대에서 활동했다.

이후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킨 당시 편성한 북지방면군사령부 공보처장과 북지파견군 총사령부 금성공보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김응조는 경찰에 투신해 전북경찰국장을 지냈으나, 1946년 2월 말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죄수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3대 경찰국장 한종건은 1919년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경성 남대분 일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같은 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이후 1927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그는 조선청년총동맹이 주최한 집회에서 조선총독부 폭압정치 반대연설을 하는 등 반일활동을 했다.

그러던 그가 1934년 전라북도 경찰부 경무과 경시로 근무하는 등 일제 강점기 경찰로 근무하면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유언비어와 기타 시국범죄 방지, 물가조정과 생산력 확충, 자원개발 등 일본의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해 ‘지나사변공적조사’에 이름을 올렸다.

4대 조병계는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해 1939년부터 일제치하 전라남도 내무부 지방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1942년 고등관 7등의 군수로 승진해 해방전까지 강원도 홍천군수, 감화군수 등을 재임하고, 1946년 전북경찰청장에 임명됐다.

5대 김상봉은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1935년 황해도 지사관방 문서계속으로 있었다.

이후 일제치하에서 황해도 경찰부 보안과와 황해도 지사관방, 옹진군수, 재령군수 등을 재직한 뒤 1944년 이사관으로 승진해 함경남도 이사관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 미군정하에서 총감으로 같은 해 12월 전북경찰청장이 됐다.

9대 김응권은 1932년 평안북도 신의주경찰서에서 순사부장을 지내고, 만주사변개전 후인 1932년 5월부터 국경 제일선의 경비 사무에 종사하며 일본의 독립군 공격, 군대와 군수품 수송 등 전시 업무에 적극참여 했다.

16대 신상묵은 1940년 일본군에 자원해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훈련소에 입소했다.

이후 1943년 중사 계급인 일본군 헌병 군조로 경상남도 진해헌병대와 부산헌병대에서 근무하며 ‘학인동우회사건’으로 김주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독립활동을 한 지사를 고문하고, 김장룡‧차익환 등을 고문했다.

또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협력해 광복운동을 추진하려 했던 항일운동가들을 고문하기도 했다.

20대 이정용은 1935년 경상남도 순사에 임용돼 1939년 고등형사로 활동하다가 1941년 진주경찰서 순사부장으로 발령받아 해방 이전인 1943년까지 근무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같이 과거 일제에 부역한 내용이 뚜렷한 전대 전북경찰국장에 대한 청산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재호 전북지부장은 “경찰 조직 내 권위주의 타파의 시작은 경찰의 과거사 청산부터 이뤄져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김용기자‧km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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