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전북 시서화의 격을 올곧게 알리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천진기) 특별전 ‘선비, 전북 서화계를 이끌다-석정 이정직’전이 10일부터 11월 24일까지 박물관 시민갤러리에서 열린다.
  김제에서 태어난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선비였다.
  천문, 지리, 의학, 수학, 서화 등 두루두루 통달한 유학자, ‘통유(通儒)’라 부를 수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 선비인 그에 대해 매천 황현은 이정직에 대해 “모르는 바 없고, 통달하지 못한 바가 없는, 향후 몇 백 년 동안 없을 인재”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인재상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전북에서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선비였다는 점에서도 더욱 빛난다.
  그는 4살 때 천자문 수십 자를 하루 만에 익혔고, 5살 때 엽전을 종이에 똑같이 옮겨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9살에 <통감(通鑑)>을 모두 읽었다. 젊은 시절부터 시문 창작에 힘써 50세 무렵 10여 권의 문집을 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전주성에 있던 그의 집(한약방)과 저작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후 그는 세상을 뜨던 1910년 11월까지 김제의 집 ‘연석산방’에서 저술활동에 전념, 산문 273편과 시 927제 1,279수를 남겼다.
  특별전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전북을 대표하는 융합형 인재, 이정직이 전통을 계승하면서 무엇을 고민했고, 지향하며 살았는지 살펴보면서, 그의 예술 활동을 통해 과거의 이정직과 소통한다.
  전시는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조선에서 근대로, 전통을 배우고 끊임없이 수련하여 후학들에게 전했던, 법첩 연구의 대가로서의 이정직을 조명한다. 글씨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수련 과정을 거쳤다. 추사 김정희를 배워 썼던 ‘완당재현첩’에서부터 오원 장승업 그림을 보고 배운 ‘오원재현첩’ 등 유명 서화가의 작품을 통해 배우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중국 서예의 맥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단순히 모양을 베껴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 및 조선 명필가의 글씨를 수없이 임서(臨書)하면서 골자를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 석정가묵 石亭佳墨 (수경실 소장) 종이에 먹, 31.5×22.0cm

  2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시서화삼절’로서 일구어간 회화 작품을 살펴본다. 사군자와 괴석 등 그가 주력했던 회화의 소재를 통해 필력과 상징성을 추구한 깊은 내공을 지닌 문인화 세계를 볼 수 있다.
   “이정직 선생이 남신 글에 ‘사군자 그림은 글씨 쓰는 사람의 일이다. 붓을 잘 쓸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필력이 중요하다, 필력은 글씨 공부에서 우러나온다. 사군자 그림은 서예가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라고 말씀했다”(민길홍 학예사)
  이정직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 그림이 훨씬 좋다고 한 바 있다. 붓끝으로 재탄생한 매화를 통해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지조와 절개, 선비정신 바로 그것이다.
  3부에서는 이정직을 계승한 후학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송기면(1882∼1956), 조주승(1854~1935) 등의 활동은 전북을 근현대 서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별전과 연계한 특강도 10월에 두 차례 열린다.
  천진기 관장은 “학문과 예술로 후학을 기르는 한편,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선비였던 이정직은 조선시대 선비 가운데서도 드문 ‘통유’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예향 전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이정직 선생의 발자취를 같이 느껴보시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사진=석정임천마부 石亭臨天馬賦 (전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 1889년, 첩, 종이에 먹, 35.7×2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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