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은 우리나라 제1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가 있고 동진강과 만경강, 금강, 섬진강 등 맑은 물이 있어 예로부터 늘 풍요롭고 기름진 땅으로 불렸다. 그러다 보니 외세의 침략에 전북 등 호남지역은 식량을 조달할 가장 좋은 곳으로 꼭 선점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백성들은 그들로부터 지역을 지키기 위해 돌과 흙으로 성을 쌓고 고군분투해 왔다.
이번에 소개할 전북의 성 네 곳은 모두 사적으로 지정된 곳으로 수천 년의 역사에서 성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현대의 역사는 아니지만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지켜내다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던 전북의 성들을 2회에 걸쳐 하나씩 만나보자.

⑴익산토성·남원읍성
▲익산토성
지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92호로 지정된 익산토성은 삼국통일 후 고구려 왕족인 안승이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우면서 만든 보덕성이라고 기록이 남아있다. 구조나 시설, 출토 유물로 봤을 때는 훨씬 이전에 세운 것으로 백제시대 무왕 때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약 100m 높이의 오금산 봉우리를 흙과 돌로 방벽을 쌓아 올렸는데 전체 길이는 약 600여m로 지난 1980년 발굴조사 당시 성문은 직사각형 석재를 이용해 벽을 쌓고 벽 뒤에는 깬 돌 등 잡석을 메웠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유물부터 고려시대 유물까지 발견돼 백제시대 축성한 이후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까지 산성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토성으로 쌓았지만 훗날 석축 등을 더해 고쳐 지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연지형을 이용해 흙을 쌓고 석축을 올렸으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익산토성 위에서 백제의 마지막 왕도인 금마저를 바라본다. 이곳에서 보면 무왕의 여러 흔적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는 것에 새삼 놀랍다.
왼쪽으로는 백제의 마지막 왕궁인 왕궁리 유적이 보이고 가운데로는 무왕의 생가터, 오른쪽으로는 무왕의 왕릉이 보인다. 모두 2km 이내이며 익산 토성 뒤로 돌아가면 무왕 때 세운 미륵사지, 무왕이 서동왕자일 때 자주 오르내렸던 사자암까지 보인다.
익산토성 둘레 길을 걸어보는데 아직도 유물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토성이지만 돌로도 쌓은 흔적이 발견되었고 유물들도 각 시대별로 다양하게 발굴되었다고 한다.
익산토성에서의 전쟁이나 전투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신라와 치열하게 다투던 백제시대의 성은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대부분 있었다.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참전할 때 처와 자식까지 죽이고 5000여명의 결사대로 필사의 항전을 펼쳤지만 단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하고 만 것도 이러한 자그마한 토성이 원인일 것이다.
백제는 결국 마지막 남은 정예병 5000명이 황산벌에서 전멸하자 버틸 힘을 잃고 660년 멸망하고 말았다. 익산토성을 둘러보면서 백제의 유적을 보니 애잔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남원읍성
남원에도 읍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남원읍성은 지난 1982년 11월 3일 사적 제298호로 지정되었는데 성벽 일부만 남아있고 현재 유물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남원은 백제시대에는 고룡군으로 불리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합쳐 9주로 나누고 정치와 군사상 중요한 지방에 작은 서울인 소경(小京)을 설치했다. 남원은 김해, 충주, 원주, 청주 등과 함께 지방의 서울인 소경이 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의 축조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신문왕 11년 남원성을 쌓았다는 기록 때문이다.
남원읍성은 1596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597년 5월 왜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대대적으로 보완 개축했다고 한다. 개축하자마자 1597년 8월 전라도의 명운을 건 호남 최대의 전투가 벌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이 패전이라고 판단해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를 우선 점령하라는 지시로 14만에 이르는 왜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눠 전라도로 진격했으며 무려 5만6000명에 달한 왜군이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진격했다.
당시 남원성에는 명나라 군사 3000명과 접반사로 따라갔던 예조참판 정기원과 총포부대 12명. 그리고 남원부사 임현 및 남원부민 7000명이 성안에 머물며 성벽을 개축하고 성 밖에 참호를 파는 등 전투준비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성 밖에는 당시 전투 흔적들이 유물로 발견되고 있는데 원래 해당 지역으로 도로가 개설될 예정이었으나 유물발굴로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성 밖의 가옥들을 모두 불태우고 성안에 군사와 부민들이 있었으며 후에 합류한 이복남의 병력 1000명 등 1만 명이 넘는 군사와 백성들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사생결단의 자세로 치열하게 싸우다 5만6000여 왜군에게 모두 전멸한 곳이다.
당시 명나라 장수 양원은 성이 함락되자 기병 50명과 함께 도주했으며 접반사 정기원도 따라 도망치다 말에서 떨어져 일분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복남 등 성에 남은 병사와 부민들은 끝까지 항전했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남원성 함락 소식을 듣고 전주에 있던 진우층 등 명나라 군사는 모두 철수했고 왜군은 전주성을 무혈입성하고 말았다.
하지만 곧 명군의 반격과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리로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전쟁은 끝났다. 전쟁이 끝난 뒤 남원성으로 돌아온 피난민들이 시신 만여 구를 모아 북문 근처에 합장했는데 그것이 만인의 총이다.
지금은 네모 형태였던 당시 남원성의 흔적은 이곳밖에 없지만 잠시나마 남원을 지키기 위해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추념해보자./김대연기자·red@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