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지 125주년, 특별히 황토현 전투가 일어난 5월 11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뜻 깊은 해이다.

“창생(蒼生)을 도탄(塗炭)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盤石)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橫暴)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다.” 라고 선언하며 일어섰던 동학농민군들, 그들의 철저한 희생속에서 자유와 평등, 정의로운 새 역사를 추구했던 혁명적인 의의가 오늘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2월 10일 고부민란이 원인이 되고, 1894년 3월 20일 고창 무장지역에서 전면 기포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어 3월 26일 부안의 백산에서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금구의 김덕명 대접주 등이 이끄는 남접 농민군 8천명이 집결하여, 4월 7일(양력 5월 11일)에는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과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하농민군은 지형적 이점과 기습전을 벌려 전라 감영군을 완전히 격파함으로서 이후 동학민혁명의 횃불이 찬란하게 타올랐다. 동학농민군은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흥덕, 무장, 영광, 함평을 점령하였고, 4월 23일에는 장성의 황룡촌에서 다시 경군을 격파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노령을 넘어 정읍, 금구 원평에 올라 전열을 가다듬어 결국 전주성을 빼앗았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자, 청, 일 양국군이 내란을 진압하다는 명목으로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학군과 경군 사이에 화약이 맺어져서,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동학농민군이 해산하였다. 이 때까지의 전투를 동학농민혁명군의 제1차라고 하는 데, 그 대부분의 사적지가 전북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답사는 김제 원평과 정읍, 고창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유적에 대한 의미와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전라일보에서 언론재단 지역발전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행사이다. 날씨는 청명하였고, 천도교 전주지부와 익산지부, 원불교 교무, 원광대학교 중국인 학생, 시민, 전라일보 기자 등 20분이 답사에 참여하였다.
 아침 8시 반에 원광대 정문을 출발할 때는 탑승한 천도교인들께서 심고와 주문을 통해 무사귀환과 성공을 기원해 주셨고, 9시 반에는 김제 원평의 집강소(도소)에 도착하였다. 향토사학자 최순식 선생의 유지를 이어 기념사업을 진행해 오신 따님이신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께서 반가히 맞아주셨다. 원평천에서 들꽃을 한아름 꺽어 오셨는데, 오늘 이름모를 무명동학 농민군의 무덤에 헌화하기로 하고 천도교 전주교구 김명국 도훈께서 받으셨다.
  집강소는 동록개라는 백정이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김덕명 대접주에게  헌정한 집이다. 이곳 도소는 김제 일대와 정읍의 고부까지 관할하였다. 김덕명 대접주는 이곳에서 각종 폐정개혁을 이루고, 동학농민군의 이상을 실천하였다. 다만, 지금의 집강소보다 배는 컸다고 하였으니, 그 땅이 모두 집강소 땅으로 되돌아오면, 이곳 도소는 옛 명성에 걸 맞는 위상과 함께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리라.   
  이어 일행은 두 번째 원평취회의 장소로 갔다. 왕버들 나무 옆에 「동학농민혁명 금구원평집회 장소 원평장터」라고 씌여진 조그만 푯말이 전부였다. 1893년 3월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함께 척양척왜를 외쳤던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외침은 온데 간 데 없고, 수령 600년 된 왕버들만 덩그랗게 서 있을 뿐이다. 왕버들은 높이가 20미터가 되어야 보호수로 지정되는데, 크기가 미치지 못해 지정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 3.1운동 등 숱한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았을 왕버들 나무의 연대를 고려하여 보호수 지정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구미란 전투 현장을 찾아가는 길은 마을을 지나 가파른 야산을 오십여 미터 올라가는 길이었다. 산 위에 품자형으로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던 동학농민군 2,000명을 구미란 마을 앞에서부터 쳐들어간 관군과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에 몰살된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 때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수십 군데나 된다. 그러나 무명동학군 무덤에는 아무런 푯말도 없고, 가파른 산길이라서 발을 삐기 십상이다. 계단이라도 만들고 사적지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도교를 대표하여 김명국 선생이 헌화를 하자, 모두 선채로 그 슬픈 넋을 추모하였다. 이곳 구미란 마을도 택지개발이 한창이었다. 논밭에 집이 가득 들어차면 옛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리라. 최고원 선생의 말로는 김제지역 기념사업회에서 ‘한평 땅 사기운동’을 추진하여 옛 모습을  보존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가녀린 여장부의 힘으로 잘 될지, 괜한 걱정이 든다. 
  다음 사적지 답사는 정읍이었다. 정읍은 고부민란이 일어나고, 이어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여 부패한 나라와 역사를 바로잡는 거대한 혁명으로 전환될 수 있게 된 곳이다. 첫 번째 찾은 곳은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했다는 고부면 주산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1893년 11월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전봉준 등 20명이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새로운 세상을 결의했다는 동학혁명모의탑이 있었다. 이 탑은 1869년 4월 뜻 있는 분들이 동학농민혁면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만든 것이다. 이어 마을로 내려가 사발통문 작성된 송두호 집을 찾았다. 마당 곳곳에는 꽃양귀비가 만발하였다. 당시 피를 토하며 절규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외침 마냥 그토록 붉은 빛이었다.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은 6.10항쟁의 주역 이한렬 열사의 모습과 동학농민군을 조합하여 세워진 힘찬 조형물이 서 있었고, 주변 빗돌 위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 십명의 동학농민군의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다. 아마도 혁명을 위해서 과감하게 목숨을 던진 분들의 목이 잘린 모습을 형용한 것이리라. 녹두 전봉준 장군을 기념하여 세운 녹두회관 2층에는 시골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실상과 사발통문의 역사적 의의를 잘 해설해 놓은 전시실이 있었다. 주산마을에서 이루어진 사발통문과 동학농민혁명 모의를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어 황토현 전투현장을 찾았다. 1894년 5월 11일 호남창의소 소속 만여 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이 관군에 맞서서 승리를 거두어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한 장소, 기념일 제정의 의미가 깃든 곳이라서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후손이었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때부터 기념탑이 세워지고 잘 다듬어진 성역이었다. 구민사,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전봉준 동상 등 여러 가지 기념물이 있다, 다만, 전봉준 동상은 친일파가 제작한 것이고, 부조되어 있는 동학농민군의 모습이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 교체될 예정이라고 한다. 올바른 역사의식 하에 역사적 사건이 제대로 조명되고 거기에 걸맞는 복원작업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일행들에게 주었다.
  말목장터는 정오가 넘어서 도착하였다. 말목장터는 부안과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형성된 시장으로서, 배들평야의 농산물과 부안 줄포의 수산물이 거래되는 큰 장터이다. 이곳은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 수백 명의 배들평 농민과 동학교인들이 모인 곳으로서 전봉준의 고부민란이 시작된 중요한 사적지이다. 당시 전봉준은 감나무 밑에서 제폭구민의 사자후를 통하였다고 하는데, 그 오랜 나무는 2003년 고사되고, 현재는 그 새끼에 해당되는 감나무이다. 말목장터는 안내판에 설명이 자세하고, 말목정과 말목적창건기념비 등 기념사업이 잘 되어 있다.
  아직도 말목 장터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식당마다 사람들로 가득 넘치고 있어서, 조금 한산한 이평반점에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고 일어서니, 벌써 1시 반,  원래 답사코스였던 부안 백산은 왕복 1시간 반이 소요되기 때문에, 고창 유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전봉준 생가에는 2시 반에 도착하였다. 향토사학자인 국담선생과 해설사인 신동찬 선생이 1시간 반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봉준은 천안전씨로서 전봉준의 7대조때에 고창, 고부 일대에 거주하였으먀, 할아버지 때에 당촌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버지 전창혁, 어머니 언양 이씨 사이의 늦동이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키는 작았지만 다부져서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3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고부로 이주하였다. 현재 당산마을에는 전봉준의 숙부, 종숙, 종형, 삼종질부 등 근친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어 마지막 코스인 무장 공음면 기포지로 직행하였다. 이미 시간은 3시가 넘어가고 있어서,  성송면 괴치리에 있는 손화중 도소도 뺄 수 밖에 없었다. 손화중 도소는 무장 사적지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손화중이 고향인 정읍의 음성마을에서 포교활동이 어렵자, 찾아온 곳이 양실과 괴치리였고, 손화중은 이곳에서 포교에 성공하여 수많은 동학교도를 거느린 대접주가 되었다. 손화중 대접주의 동학농민군이 무장기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찾은 곳은 무장 공음면 기포지였다. 이곳도 겨우 세시 반이 되어서 도착하였다.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진윤식 이사장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공음면 당산마을은 고부민란을 일으킨 전봉준이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부하 50명과 함께 내려와 무장 대접주 손화중과 김성칠, 정백현, 송문수 등과 함께 거의(擧義)를 모의한 곳이다. 모의를 시작할 때는 1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무장기포를 선언한 3월 20일에는 4,000명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법성포 황현리 대나무 밭에서 죽창을 만들어 오고, 민간에서 조총, 호미, 낫, 삽을 조달하였다. 미곡상 안덕필로부터 백미 60석을 빌리고 군사훈련을 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3월 20일에는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무장읍성을 거쳐 백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진격로는 오늘날  진윤식 이사장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고, 곳곳에 안내 표시를 했다. 이곳 무장 기포지는 진윤식 이사장을 비롯한 고창군민들의 노력으로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동학농민군훈련장, 무장포고기념탑, 동학농민혁명발상지기념비 등 여러 가지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황토현 전적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나, 동학농민 진격지의 경우 순례하는 분들이 거의 없어서 잘 가꾸어놓은 진격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지 걱정되었다. 현장 복원도 좋지만, 이후 관리와 계승사업도 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일행들은 4시가 넘어서야 고창 무장 기포지를 떠나서 고창과 김제를 거쳐 5시 20분에야 원광대에 도착하였다. 일행들은 6월 8일 태인과 임실, 남원의 2차 동학농민혁명 답사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하였다. <김봉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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