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불자와 관광객들로 북적임에도 경건함과 한적함을 간직한 고창 선운사.

문 없이 굵직한 기둥과 화려한 색감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선운사 안 ‘만세루’와 이를 의식이라도 하듯 더 은은하고 더 투명한 모습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한지’가 제각각인 듯 어울린다.

언제인지 모를 그 날부터 호흡을 맞춘,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교와 한지의 관계를 보는 듯하다.

(사)전주한지문화산업연구소(소장 이유라 전주대 문화산업대학원 교수)가 주관하고 선운사, 전주대학교, 전라일보가 후원하는 전시 ‘부처님 전에 천년 한지를 담아내다’가 4일부터 12일까지 고창 선운사 만세루에서 열린다.

이유라 교수와 전주대 문화산업대학원에서 한지문화예술학을 전공한 이들이 12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절에서 천년고도 전주의 한지를 알리고 과거 명성을 되찾고자 나선 것. 작품 판매 수익 일부는 소아암을 앓는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첫 날 오후 2시 가진 개막식에는 이유라 교수, 도솔산 선운사 주지 경우 스님, 선운사 스님들과 참여작가, 방문객 50여명이 함께했다.

도솔산 선운사 주지인 경우 스님은 “작가들이 작품을 준비하느라 고생했다. 관광객들과 불자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줘 고맙다”며 “불교문화 속 한지 쓰임새는 너무도 쉽게,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자리를 통해 금빛 찬란한 한지 옛 명성을 되찾고 전주 한지 우수성을 널리 알리길 바란다. 나아가 전통한지를 재해석해 한지가 미래 산업 주역이 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유라 교수는 “한지가 불교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인간과 한지는 너무도 닮았다”면서 “한지 면면 즉 인간의 삶 속 다양한 생활문화를 절 안에 담았다. 부처님 전에서 천년 한지를 통해 우리네 역사를 마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의 경우 주제를 정하지 않았으나 과거 한지를 오롯이 드러내면서 오늘날 한지를 어떻게,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시험한다. 불교와 관련된 것들도 여럿이다.

빨강, 초록 같은 강한 색이 대부분이고 만만찮은 나이테를 지닌 기둥들이 쉴 새 없이 솟은 전시 공간, 작품에 주목하도록 사용한 도구는 ‘한지발’이다. 하얀 한지발을 중간 중간 내려 그 위 작가를 소개하는 한편 작품에의 집중력을 높인다.

여기에는 새롭고 추상적인 한지 현대조형작 50여점과 전통한지공예 50여점, 프리미엄 한지수의, 반려동물 한지수의, 장례용품 모두 120여점이 자리한다. 불교적인 색채를 띤 작업도 여럿이다.

눈길을 끄는 건 수의와 납골함을 비롯한 한지 장례용품이다. 오랜 시간 보존할 뿐 아니라 온도와 습도를 자연스레 조절하고 화장 시 완벽 연소하는 등 살아 숨 쉬는 한지 장점을 오늘날 환경문제에 활용하려는 지혜가 돋보인다.

반려동물을 위한 장례용품도 있다. 한아름 작가는 “출근길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차에 치어 죽은 걸 자주 목격했다. 한지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들을 흰색 한지로 덮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계기를 전했다.

그는 3년 동안 몸담은 회사를 내려놓고 반려동물 장례용품을 한지로 제작한다. 반려동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의를 입고 유골함에 넣는다. 생소한 이야기 같지만 현재 국내 반려동물 납골당이 30여개에 이르고 중국시장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고.

강수영 작가는 전통 지화공예에 현대 기법을 더해 과거와 현재 그 어디쯤에 머문 한지꽃을 구현한다. 김금비 작가는 불교에서 참선기도하듯 사랑과 정성을 유달리 머금고 빚은 지호공예(한지죽공예)로 친근하게 다가선다.

서재적 작가는 한지 위 한글을 쓴다. 가장 한국적인 두 가지를 아울러 더 한국적인 무언가에 다다르는 중이다. 소진영 작가는 전통 한지등에 현대를 덧대 기하학적이면서 예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장에서 진행하는 체험으로는 한지 연꽃부채, 전통한지공예, 한지 카네이션, 한국화 퍼포먼스, 캘리그라피 방향제 만들기가 있다. 참여작가는 이유라 강수영 김금비 김옥영 김정희 김혜원 마진식 서재적 소진영 위선옥 한아름 11명이다.

 

 

이유라 교수 인터뷰

“절에서 한지를 선보이는 건 처음이지만 해보고 싶었던 전시입니다. 한지 흔적을 불교에서 찾을 정도니까요.”

이유라 교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언급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한지다. 절에서 한지등을 사용하고 예전엔 스님들이 직접 종이를 떴다. 보온을 위해 한지를 승복 안 누볐다”고 했다.

본인의 작품인 수의와 납골함도 설명했다. “국토는 한정적이고 환경은 한 번 상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만큼 장례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대안은 한지인데 수의 매장 시 완전 부패하고 화장 시 완전 연소돼 별다른 조치 없이 영구보존할 수 있어요. 납골함도 통기성이 좋아 부패하지 않습니다. 납골함에 자연스레 만들어진 명당(지명당)이란 이름을 붙인 건 그 때문이죠.”

이 교수는 마블링 브로치도 선보였다. 작업하다 남은 한지들을 모아 100여장 덧붙인 다음 완전 건조해 잘라준다. 나무 나이테처럼 깎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내 만드는 재미는 물론 보는 재미를 더한다.

“다시 한 번 절을 찾을 겁니다. 한지 미래를 고민하는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작업이나 불교와 한지 관계성을 깊이 있게 살피는 작품이나…주제를 갖고 준비할 계획입니다.”/이수화기자‧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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