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국민연금공단
             
 와이셔츠를 다린다. 다리미판에 와이셔츠를 뉘어 놓고 다리미를 민다.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는 신작로처럼 훤한 길이 열린다. 훤한 길 위로 지친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내에게 아이들을 맡겨두고 이곳에 온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아이들과 살림에 부대끼는 아내에게 작은 짐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서 내 스스로 양말과 속옷을 세탁하고 와이셔츠를 다린다.
 평소 아내는 이러한 사소한 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 교육이나 시골 부모님 안부 전화까지 모두 도맡아 한다. 나는 평소 직장생활을 핑계로 밤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주말부부가 된 지금에는 더욱 가정에 소홀해졌다. 아내의 말처럼 가장이라기보다는 잠만 자고가는 하숙생이 되었다.
 지난 일요일, 그날도 모임이 있어 집에 늦게 들어갔다. 아내는 나에게 눈인사만 했을 뿐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막내의 학교 준비물을 확인하고, 다음날 새벽에 나를 보내기 위해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근처 학원에 가서 둘째아이를, 밤 1시가 지나서는 근처 독서실에서 수험생인 큰애를 데리고 와서 간식을 챙겨 먹이고, 아이들이 잠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하려던 아내는 와이셔츠를 다리는 것을 잊었다며 와이셔츠를 다리기 시작했다. 다리미판에 와이셔츠를 올려놓고 옷을 뒤집어가며 정성스레 다림질을 했다. 몇 분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와이셔츠를 다리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이셔츠의 소매를 다리고, 등을 다리면서 다림질 할 부위가 바뀔 때마다 아내의 어깨는 들썩였다. 그 모습이 남편인 나를 향해 원망하며 훌쩍이는 모습처럼 보여 잠시동안 가슴이 짠해졌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가 준비해 준 가방을 열었다. 일주일동안 입을 와이셔츠와 양말, 속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비닐에 양말과 속옷을 따로따로 넣어 두었고 와이셔츠는 구겨지지 않도록 한번만 접어 가방의 벤드로 고정시켜 두었다. 그것을 보면서 바쁜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하고나면 미안함이 줄어들 것 같아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시작했다.
 와이셔츠를 다리미판에 올렸다. 그리고 다리미를 손에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와이셔츠를 잡고 먼저 목과 소매를 다렸다. 그리고 와이셔츠 단추사이를 다리고 소매와 등을 다렸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소매와 등에 줄을 세웠다. 군대제대 후 처음하는 다림질이니 20년이 훨씬 지났다. 그래서인지 손이 많이 무디어졌다. 군대시절에는 한번만 다려도 칼줄이었는데 맘처럼 되지 않았다. 애써 다렸지만 또 두 줄이다. 줄을 지우고 다시 다리기를 몇 번을 해서야 다림질을 마무리를 했다. 아내는 잠시 했던 것 같았는데 나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다림질을 끝낸 와이셔츠를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깔끔히 다려진 와이셔츠를 보았다.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는 나와 처음 만난 날 아내의 모습처럼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엹은 미소를 짓고 있다.
 아내가 지금까지 세탁을 하고 주름을 펴고 줄을 세워야 했던 것이 어찌 와이셔츠뿐이었을까. 성격이 급하고 경쟁에서 지기를 싫어하는 나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와이셔츠의 주름만큼이나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이 많았다. 첫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 사표를 내기도 했고, 새로운 직장에서 기대했던 승진에 몇 차례나 떨어져 실망을 하기도 했고, 큰 돈을 벌겠다고 주식투자와 사업을 실패하여 많은 돈을 날리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마음에 심한 상처를 받고 방황했었다. 내가 방황할 적마다 아내는 와이셔츠를 세탁하고 주름을 펴고 줄을 세우듯이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격려로써 내 마음의 주름을 펴서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진정으로 서로의 주름진 부분을 다려 펴주는 것이 부부의 관계가 아닐까. 가정에서 접혀진 아내의 마음을 다려주고 아내는 직장에서 주름진 남편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부부가 아닐까.
 지금까지 나는 아내의 접혀진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렸을까 생각해 본다. 한 집안의 맏종부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역할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불만을 표현하기보다는 삭이는 일이 많았을 것이고, 만족하기보다는 실망이 많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아내의 주름을 펴주었을까 반성해 본다.
 와이셔츠를 다리며 아직 식지 않은 다리미의 온화한 열기에서 아내의 체취가 느껴진다. 멀리 있는 아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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