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와 이종희장군생가
 

기획=3.19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김제 원평장터는 전라도 농민들이 1893년 봄에 집결해서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외세로부터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던 민족운동의 성지이다.

당시 동학농민혁명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된 원평집회는 26년이 지난 후 농민들의 3.1만세운동으로 다시 터져 김제지역에서 3.1만세운동 만세함성이 처음으로 성공리에 울려 퍼졌다.

김제군 수류면 구월리 구봉마을에 살던 스물다섯 살의 청년 배세동이 음력 2월 12일 전주시장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서 곧바로 뜻을 함께 할 동지를 규합해 구월리 어유마을의 지도자 전도명(당시 48세)을 찾았다.

일찍이 동학농민혁명 구미란 전투에 참가했던 사실을 숨기고 살았던 전도명은 같은 마을에 사는 전도근, 고인옥, 전부명, 김성수, 전천년, 이완수, 이병섭을 규합했다.

배세동과 전도명 등 그의 동지들은 서둘러 음력 2월 19일 원평장날을 거사 날로 정하고, 장터에서 일본 무장헌병의 감시가 덜해지는 저녁 6시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하고, 이병섭과 그의 동지들이 각지에 긴밀한 연락을 했고, 배세동과 전도명 등은 밤마다 직접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옮겨 적었다.

-광복군 제1지대장 이종희 장군도 동참

최세현의 제자로 훗날 광복군 제1지대장을 지낸 이종희가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에 함께한 후 만주로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기록은 아직 발굴 되지 않았다. 1919년 음력 2월 19일 원평장날, 기미독립만세운동은 그렇게 아홉 명의 농민들이 주도면밀하게 이끌어갔다.

드디어 원평장날, 배세동과 그의 동지들이 구척의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매달고 무명의 동학농민군 무덤이 있는 구미란 산길을 달렷다. 원평장터 입구 커다란 왕버들나무들이 서있는 우(牛)시장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시각 저녁 6시, 일몰이 시작되고 원평장터에는 독립선언문 낭독이 울려 퍼졌다. 마치 약속을 하고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사람이 모여들었고 김대희 외 수 백 명의 장꾼들이 뛰어나와 원평장터는 삽시간에 남녀노소 구분 없는 시위군중의 만세함성으로 들끓었다.

특히 전도명이 살던 어유마을 사람들은 대다수가 동학농민군의 후손들로 당일 만세운동에는 어린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꾼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일제의 무장헌병과 경찰들에 의해 배세동과 그의 동지들이 현장에서 검거 되었고 장꾼들은 강제해산 당했다.

원평장터 만세운동이 벌어진 이튿날 새벽에는 일본 헌병 백여 명이 어유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공포의 수색을 벌였다. 백여 명의 일본 헌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노인부녀자 가리지 않고 군화발로 걷어차며 안방에 들어와 총대로 윽박질렀으나 어유마을 주민들은 누구하나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렵고 무서웠을 감시 속에서도 옥고를 치루는 독립투사의 가족을 서로 보살폈고, 야간의 틈을 이용해 일 년 농사를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거룩한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배세동 외 8명의 독립투사들은 모진 고문 끝에 6월에서 1년의 실형을 받고 출옥했으나, 일본경찰의 감시와 사찰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주도자였던 배세동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배세동은 여수에서 재구속 되었고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48세에 목숨을 잃었다.

1989년에 김제군 지원과 주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동안 원평만세운동의 정확한 자료와 증거를 찾기 위해 수년간 조사를 거듭하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유족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웠기에 자기조상의 자랑스러운 애국운동을 아예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인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지역사회의 무관심과 유족들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차원의 포상은커녕 추모의 빗돌하나 없었으니, 이 고장에서 낳고 자란 후인으로서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실, 원평장터 독립만세운동은 ‘김제군사’,‘전북도사’에도 흔적이 없고, 투쟁사료와 재판기록이 누락되어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에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사’에 언급된 원평장터 독립만세운동이 그나마 문헌으로 유일한 근거였고, 고인이 된 최순식 향토사학가가 직접 국가기록물과 재판기록을 뒤져서 발굴한 역사이다.

어쩌면 이 또한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3.1운동까지 일제의 잔혹한 탄압의 증후가 아닐까, 지나치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삶이 고단해진 사람들에게 100여 년 전의 역사는 문헌에 기록되지 않아도 대를 이어 생생하게 구전으로 이어져 왔고, 마침내 찾아야한다는 집념이 재판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원평장터사람들은 재판기록물을 찾은 이듬해에 원평장터와 어유마을에 각각 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음력 2월 19일 원평장날을 양력날짜로 환산하면 3월 20일이지만 농민들이 원평장날에 장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그 사실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3월 19일 원평장날에 기념행사를 열어오고 있다.

3월 19일,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서른 번째 행사를 이어오는 지난 30년 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념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올해 3월 19일에도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금산면지역발전협의회와 함께 10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김제=최창용기자ccy@jlnews

(자료제공=(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최고원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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