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1년 이상이라는 시간과 수백만의 민중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됐으며 동시대에 일어난 세계 민중운동사에서 최대 규모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많은 민중들이 장기적인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사상이 민중 속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신분제 해체를 통한 만민평등의 평등 사회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나누고 돕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동학농민혁명 사상에 민중들이 호응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동학혁명으로 희생된 사람은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많은 희생을 치를 정도로 항쟁이 계속 된 배경에는 일본과 정부의 기혹한 탄압이 있다. 또 가혹한 탄압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표출된 열망은 신분제 폐지, 광무개혁을 탄생시켰고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반 침략주의 노선은 한국 근현대 민족·민중운동의 원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특히 동학혁명의 이상은 1919년 3.1운동을 거쳐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면서도 한층 승화된 형태로 표출됐다.
  ▲3.1독립운동
  만세 운동은 고종 장례식날 일어났다. 종교지도자 33인 가운데 천도교 지도자 15명은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자인 접주 출신이었다. 33인은 전원 체포되고 민세운동은 노동자, 농민 등 민중과 학생들 중심으로 전개됐다. 파고다공원에서 학생과 민중만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시위는 가혹하게 탄압받았지만 운동은 왕성하게 전국화됐다. 운동은 황해도나 평안도, 전라북도와 같이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서울의 소요와 국장을 목격한 이들이 귀향하여 그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 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3.1독립운동 당시 평화적이던 만세시위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당한 뒤 무기를 든 항쟁으로 변해가기도 했다. 이런 양상은 동학혁명 당시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의 양상과 동일하다. 민중들이 가혹한 폭력 앞에 노출됐을 때 생존과 방어를 위한 자위권적 수단으로써 최소한의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3.1독립운동은 전반적으로 평화적인 시위 운동으로 일관했다. 민중들이 상점과 헌병 숙사등을 습격하기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물품을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 절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당시 피해상황은 정확하지 않다. 총독부가 가능한 한 축소하여 보고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 상황중에 일제의 가장 야만적인 탄압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제암리 학살사건’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이다.
  ▲전북의 3.1독립운동
  전북지역 3.1독립운동은 군산, 김제(원평), 남원, 익산, 임실, 정읍 등지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전북의 사례 가운데 동학혁명과 3.1독립운동에 모두 관여했던 김영원(1851~1919)선생과 박준승(1866~1927)선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평가와 계승
  첫째,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은 비폭력운동으로 일관됐다. 비폭력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2016년 촛불혁명으로 까지 계승된다. 비폭력이야 말로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결정적 내용이자, 우리 모두가 계승해야할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둘째, 동학혁명의 비폭력 정신을 계승한 3.1독립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샤탸그하라운동, 이집트의 반영(反英)제국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으로써 20세기 전반 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불멸의 지위를 획득하게 됐다.
  셋째, 동학의 평등사상은 3.1독립운동 직후 수립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킴으로써 발전적으로 계승된다. 요컨대, 3.1독립운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난망했을 것이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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