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효 국민연금공단 연금급여실

 집안일을 한다. 얼마 전부터 아내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한다. 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게다가 둘째 아이 학교까지 챙겨 보낸다. 나는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주말에 이틀 정도만 집안일을 하는데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힘든 일이다.
 아내가 왼쪽 손목을 다쳤다.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넘어지면서 손을 짚은 모양이다. 병원에서 손목에 금이 갔다면서 깁스를 해 주었다. 의사는 한 달만 지나면 깁스를 풀 수 있다며, 그 동안은 한쪽 손은 사용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한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게 불편한지 물건을 옮기거나 청소를 할 때 깁스한 손을 사용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병원에서 회복이 늦다고 했다.
 지난 주말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아내는 큼지막한 쓰레기를 두 손으로 옮기고 있었다. 팔목이 잘 낫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깜짝 놀라 아내의 쓰레기를 뺏었는데 꽤나 무거웠다. 쓰레기를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깁스를 한 손으로 그릇을 닦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마음이 짠하여 잠시 서 있었다. 그 뒤부터 나는 주말마다 집안일을 시작했다.
 신혼 초였다. 첫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무직자였던 나는 가끔 축구를 했는데, 발등이 밟혀 발목을 다쳤다. 발목 골절상을 당하였다. 그때 나는 지금의 아내처럼 오랫동안 깁스를 했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집안일을 하면서 내 병간호를 했다. 당시 옛날집이라 재래식 부엌과 화장실이 많이 불편했지만 아내는 불평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나는 통깁스를 한 발이 가렵고 불편해서 짜증내는 날이 많았는데 아내는 묵묵히 다 받아 주었다.
 깁스를 한 어느 날, 병원 진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리어카에 몸을 의지한 채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엄마는 앞에서 끌고 아내는 아이를 등에 업고 뒤에서 밀었다. 산동네라 오르막이 많았다. 집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아내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아내의 등에 땀이 흘러내리자 아이가 불편했는지 울기 시작했다. 나는 리어카를 세웠다. 미안한 마음에 걸어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나는 몇 걸음을 걷지 못하고 넘어져 아침 먹은 것까지 모두 토하고 말았다. 아내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시원함보다 미안함이 밀려와 나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미안함에 흘리는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번 연휴는 나흘이다. 징검다리 휴일인데 휴가를 냈다. 며칠 동안만이라도 아내를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설거지를 한다. 그릇을 닦고 헹군 뒤에 수저를 삶는다. 싱크대 음식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는다. 그리고 잠시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귤이와 눈을 맞춘다. 귤이는 오래 전부터 함께 살아온 반려견이다. 귤이는 같이 놀아달라고 한다. 양말을 던져주면 귤이는 물어온다. 그 양말을 다시 던지고 물어온 양말을 또 던진다. 귤이는 그게 좋은지 꼬리가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지친 모습을 보이면 귤이에게 간식을 준다.
 연휴 첫째 날이다. 아내가 경산을 간다고 했다. 조카에게 과외하는 날이다. 경산까지 제법 먼 거리라 한손으로 운전하기는 만만찮다. 땀에 젖어 있는 그날의 아내 모습이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아내와 같이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차문을 열어주고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 과잉 친절에 헛웃음을 짓는 아내를 모른 척하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슬며시 깁스한 손을 잡았다.
 첫아이를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내를 기억해 본다. 힘든 몸으로 못난 남편의 발이 되어준 아내였다. 시어머니에게 다정한 며느리였다. 돌이켜보면 그런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한 기억이 없다. 오늘은 아내가 잠든 사이 깁스한 손에 유치한 낙서를 한다. ‘죽는 날까지 그대의 왼손이 될게’ 라고. (원고지 1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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