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북미 내륙 깊은 곳 캘거리에 있었다. 대학시절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했던 유학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제주를 떠나는 날, 어머니가 내 손을 놓지 않으시려고 안간힘을 쓰셨다. 늦가을 마른 가지처럼 앙상하게 야윈 어머니의 손힘은 엄청났다. 마치 누군가 막내딸을 뺏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전과는 다른 어머니의 행동에서 뭔지 모를 서글픈 이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떠나보내면 죽어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셨나보다. 어머니는 빨리 돌아오겠다는 나의 다짐을 받고서야 공항리무진 버스에 나를 태워 보내셨다.
한달하고도 달포가 지난 어느 밤이었다. 꿈을 빌려 어머니께서 캘거리를 방문하셨다. 여느 때 모습 그대로였다. 숯검정 물들인 짧은 파마머리에 알록달록 꽃무늬 반팔 상의와 고무줄 치마를 입으시고 파란 고무슬리퍼를 신고 계셨다. 평안한 미소를 보이셨지만 얼마나 많이 우셨는지 목이 쉬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불길함에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큰 언니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의 안부를 전화로 물었다. 꿈은 반대의 뜻이니 성공하고 돌아오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은근히 그 대답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사십에 다시 시작한 공부였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려고 그 나이에 비싼 돈 들여가며 유학을 가냐는 친한 대학동기의 나무람도 있었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싶었다. 목표했던 공부를 더 늦기 전에 꼭 마무리 하고 싶었다.
외국에서의 공부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가족을 그리워할 여유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과제물과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강의 내용을 소화하느라 두 달이 정신없이 지났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자린고비처럼 절약해 두었던 잠을 즐기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자리돔 젓갈이 짙은 비린내를 풍기듯 공포가 밀려왔다.
남편은 먹먹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친정어머니의 죽음을 알렸다. 심한 충격이었다. 한겨울 밤 어머니의 죽음에 나는 침대에서 맥없이 튕겨져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어머니 손을 놓친 어린 아이의 막막한 절망감이었다. 그 절망감으로 가슴이 꽉 조여 죽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가 돌아갈 곳을 영원히 잃을 것 같았다. 삶에 버림을 받거나 죽도록 삶이 싫어졌을 때 나를 다독여 줄 마지막 성(城)을 놓칠 것 같았다. 그 뒤 몇 달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린 무중력 상태였다. 살아 있는 것이 철면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길을 나섰다.
머나먼 이국땅의 바깥바람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버스 안에서도, 길 위에서도, 학교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어머니에게 선혈을 흘려 넣지 못한 손가락 끝이 시려 울었다. 몇 겁이 흘러도 갚을 수 없는 어머니의 은혜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어린시절 기억이 자꾸 되새김질 된다.
중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심한 독감에 걸렸다. 건강했던 딸이 40도를 넘나드는 고열로 정신 줄을 놓는 모습에 어머니는 와르르 무너졌다. 자정을 넘긴 제주의 약국은 계엄령 치하로 잠수하듯 문을 삼엄하게 닫아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살려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내 약국을 찾아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힘은 강했다. 심한 두드림으로 유리창이 깨지면서 약사의 깊은 잠을 깨웠다. 어머니는 약국에서 욕 한 바가지를 곁들인 약의 효험이 식어버릴까 품에 안고 내달리셨다. 유리에 찔린 당신의 몸은 아랑곳 않고 막내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그 먼길을 다녀오셨다. 덕분에 나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목숨 줄을 놓칠 때까지 작은 딸 이름을 입에 달고 있었다는 어머니! 임박한 죽음보다 마지막 유학 기회를 포기할 것을 더 두려워했던 어머니!
그해 8월에 어머니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어머니의 애절한 부탁으로 누구도 나에게 발설하지 못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어머니는 서서히 말라갔다. 그해 가을은 온 들녘이 몇 년 만에 찾아온 풍년으로 황금빛 자태를 드러냈건만, 어머니는 진한 녹물을 머금은 듯 우중충해져갔다. 여름 무더위로 입맛을 잃어 야위었다며 날씨가 선선해 졌으니 금방 살이 오를 거라며 한사코 병원 가기를 거부하셨다. 딸의 유학을 오랫동안 반대했던 아픈 마음을 어머니는 고스란히 가슴에 묻으며 세상을 뜨셨다.
올 겨울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묘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겨울 햇살을 받은 눈은 찬란하게 은빛 물결을 출렁이고 있었다. 그해 겨울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어 한 움큼의 눈을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눈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그해 겨울은 아픈 추억만 남기고 어머니는 영원히 나를 떠났다.
   /강수화 농촌진흥청 감사담당관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