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기대어

오피니언l승인2018.12.06l15면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동안 시선이 창밖으로 갔다. 아늑하다. 9월 초입이라 바람에 벼이삭들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삭들이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마치 팝스타의 손짓에 반응하는 관객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입김에흩날리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이 무척 따스하게 느껴져 우두커니 선 채로 잠시 가만히 지
켜보았다. 1층 공동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며칠 전보다 공기가 부드럽다. 여전히 덥고 습하긴 했지만 뺨과 팔에 닿는 더위는 예전보다 덜하다. 아마 올해 여름에게 할당된 열기가 거의 다 소진되었나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없는 이 열기가 처음으로 애틋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뭘까. 내가 이전과는 달리
조금 더 여유로워졌기 때문일까. 아니면이 여름이 아버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애틋함 속으로 한걸음씩 발을 내딛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외골수였다.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것 외에는 도통 집중하지 못했다. 그게 설령 돈이나 학업에 관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런 성격을 아버지는 영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그런 이유로 성인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와 참 많이도 말다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경험이나 마음 씀씀이가 헤아려져 이해가 되지만, 철없던 시절의 내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6.25 전쟁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 어린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버지가 겪은 세상은 모질고 차가웠다. 그런 세상을 내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철부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무엇이 되고 싶으셨는지, 무엇을 이루고 싶으셨는지는 잘 모른다. 설령 어떤 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허락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과 냉전을 끝없이 반복하며 지내던 우리는 다행히 대화는 간간히 했다.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세상은 정글이라고 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를 덮쳐 올 것인지 알 수 없다며 관심이 없는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했
다. 무슨 일에든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정글에는 여러 종류의 동식물이 있고 각자는 부여 받은 생김새와 능력에 따라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죽고 사는 문제는 운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여겼다. 아버지의 많은 충고에도 내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완고함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DNA이었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는 치료가 힘든 지병을 얻으셨다. 키는 작지만 호랑이처럼 무겁게 걸으시던 분이 이젠 고양이처럼 걷고, 천둥처럼 울리던 목소리는 쇳소리로 변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정글 속에서 대비하지 못한 것은 흐르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아버
지의 말씀을 그분의 삶에 연계하여 곱씹었다. 내 삶에 여전히 적용할 수 없는 말
씀도 많았지만 시간이 나에게 들려준 말과 일치하는 것도 많았다. 나는 그렇게 내 안에서 아버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며 그 분의 삶을 조금씩 이해해 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없이 다투면서 서로의 안에 구멍을 파놓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씨앗도 뿌렸음을.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서로 뒤엉켜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단단히 연결되었다는 것을. 술래잡기를 하듯 서로에게 닿으려 했지만 닿지 않았을 뿐이었다는 것을. 한 쪽이 멈추니 비로소 닿게 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그저 세월이 지나면서지나친 승부욕을 버렸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결국 나는 아버지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짐작컨대 아버지가 그간 내게 보내준 사랑은 한번도 나보다 덜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여름 내내 거칠고 흥분된 노여움을 내뿜던 태양은 이제 내 어깨를 지나 무릎까지 내려왔다. 나를 녹여 없앨 것만 같
던 그가 내 어깨에 기대는 모습을 보며손을 내민다. 왜 진작 아버지의 손을 이
렇게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때는 아버지의 손이 너무 뜨거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나직이 변명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제 강대한 권능이 거의 사라진 태양을 등에 업고 천천히 걷는다.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렀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괴롭거나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약해져가는 이 열기가 아쉽게만 느껴진다.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여름을 아쉬워하기는 처음이다.
/임성우 국민연금공단 기획조정실


오피니언  opinion@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전라일보소개기사제보광고안내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60-040]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로 75  |  대표전화 : 063)232-3132  |  팩스 : 063)284-070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유 동 성
Copyright © 2018 전라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