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적 관점에서 한글의 위상과 그 영향에 대해 고찰한 <한글과 과학문명(들녘)>이 출간됐다.
  최경봉 원광대 교수와 시정곤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가 함께한 이 책은 과학문명사적 맥락을 천착하면서, 한글의 제자원리에 내포된 성리학적 과학주의를 톺아보고, 한글의 보급.확산이 조선 사회의 변화와 과학문명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주요하게 검토한다.
  이러한 고찰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첫 번째 고찰은 한글이 15세기 조선에서 창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국문의 지위에 올라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고찰은 한글이 조선 사회와 조선의 과학문명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개화기 이후 한글이 우리 근대 과학문명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로서 다음의 네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15세기 한글의 창제와 19세기 말 국문으로의 격상 문제를 당시 세계질서의 흐름과 관련지어 살핀다. 한글의 창제는 아시아 문자문명 전개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중화문명의 핵심인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바탕을 둔 창조물이지만, 한편으로 중화질서의 틀 내에서 우리 실정과 풍토에 맞는 새로운 체제와 기술을 도입하고 우리 식 표준을 개발하려는 의지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둘째, 국문으로의 격상 문제에 관해서는 서구문명의 도입과 중화문명의 해체라는 변화 과정에서 한글의 역할이 변화하는 맥락에 주목한다. 갑오개혁으로 국문이 된 한글은 일반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근대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과학문명사의 관점에서, 한글의 국문화(國文化)는 한국 과학문명의 혁신적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셋째, 성리학적 사고의 틀을 근간으로 창제된 한글은 위에서 아래로 중세의 지배 이념을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한글이 보급되고 확산되면서 조선 사회는 소통 방식에서 일대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넷째, 근대화 과정에서 한글이 근대적 과학기술지식의 착근과 확산에 끼친 영향에 주목한다. 국문으로 격상된 이후, 한글 활자가 널리 퍼지면서 인쇄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한글 인쇄문화의 발달은 빠른 기간 안에 서구적 과학지식을 보급하고 수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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