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환 전주시설공단 이사장 

 찬물을 끼얹자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만개한 꽃의 계절에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이치를 떠올려봅니다. 가슴 벅찬 약속을 내세우며 권력의 자리를 향해 뛰는 선거의 시기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의 뜻도 새겨봅니다. 삶의 진리는 자연의 섭리를 뛰어 넘지 못함을 깨닫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영광의 시간은 짧고, 일상과 평범의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 빛나는 시절을 어떻게 보내고 잘 매듭짓느냐가 나머지 보통의 인생에 대한 평판을 좌우합니다.
  목련이나 동백이나 활짝 핀 모습이 아름답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화려한 꽃의 시기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만 가장 빛나는 시절인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지나고 꽃이 떨어질 때의 모습은 대조적입니다.
  소설가 김훈은 목련과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이렇게 극사실적으로 표현했더군요.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사람이든 꽃이든 어차피 화려했던 절정의 시기를 매듭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주접스런 꼴 보이지 말고 동백꽃 지듯‘눈물처럼 후드득’떨어져버리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죄 없는 목련에게 미안한 비유지만요.
  한때 이 나라 최고의 권좌와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듣기 민망하고 뒤끝 지저분한 소식들을 듣다보니 요즘 더욱 그런 마음이 듭니다.
  하긴 사람이란 본디 연약한 존재라서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작은 완장이라도 채워주면 마치 그 자리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특권의식을 갖고 소위 ‘갑질’을 하다 망신살 뻗히는 일이 의외로 많습니다.
  한동안 언론과 인터넷 공간을 달궜던 대한항공 조모 부사장의‘땅콩회항’사건과 라면이 불었다며 여승무원 얼굴에 뜨거운 국물을 쏟아 부은‘라면상무’, 호텔 입구에 주차해있던 자신의 차를 빼달라는 지배인의 머리를 장지갑으로 때린 중견기업 회장 등의 모습을 보면 특권의식과 비인간적 ‘갑질’이 우리 사회에 일종의 문화가 된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평범한 시민들까지‘갑질’대열에 전염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조금만 비위가 틀리면 고객이 점원에게 막말을 하는 것은 다반사고 무릎을 꿇게 하거나, 심지어 뺨을 때려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소식들도 심심찮게 듣습니다. 고객은 왕이라는 광고 메시지에 세뇌되었기 때문에 은연 중 왕권의식이 생겨 그런 것일까요?
  언제 어디서나 ‘갑’인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을’인 사람도 없고요. 누군가의 ‘갑’은 누군가에겐 ‘을’이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누군가의 ‘윗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랫사람’이기도 합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입장과 위치는 수시로 바뀌는 것이고,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것이 인생사의 이치입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미세먼지 자욱해도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의 아름다움은 가릴 수 없나봅니다. 산수유를 선두로, 목련, 매화, 개나리가 곱게 피어났고 벚꽃도 자신의 화려함을 맘껏 뽐낼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찬물을 끼얹자는 것은 아니지만, 만개한 꽃의 계절에 열흘 붉은 꽃이 없음을 기억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선거의 계절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의 뜻을 새기며, 우리 모두 특권의식과 ‘갑질’일랑 쓰레기통에 버리고 좀 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사회로 성숙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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