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때 211명의 양민이 학살된 섯알오름.

산 자의 지문으로 죽은 자의 침묵을 써왔으나/죽은 자의 노래로 산 자의 슬픔이 위로받으려니
//봉인된 돌이 있다/쓰이지 못한/새기지 않은 이름이 갇혀 있는,/살아서는 낙인 붉은 사람들의/뼈와 살로 화석을 이룬/이를 악물고 그을린 울음 같은 비가 있다/거기 떠난 자의 다홍빛 명정에/흰 글씨를 써넣어야 하는가/지박령의 검은 이름표 블랙리스트로/탕탕 저격해야 하는가//백비, 부를 수 없어 말문을 닫은 묵비/때가 되었다 누워 있는 돌이 일어나/사람의 말로 외칠 것이다/증언되리니 아비와 그 어미와/아이들의 한라산이 매장당한 근대사/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했던 평화의 피가 <박남준 ‘잔인한 비문’>

  ‘가장 아름다운 땅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제주4.3을 기억하는 한국작가회의 소속 90명의 시인들이 제주4·3 70주년 기념 시 모음집 <검은 돌 숨비소리>(걷는사람)를 펴냈다.
  <검은 돌 숨비소리>에는 4?3의 고통스런 역사와 4.3정신 등을 소재로 한 시 90편이 담겨 있다. 제주 지역은 물론 전북작가회의 회원 박남준, 박두규, 손세실리아, 유용주, 정우영, 황규관 등과 함께 전국 각지 작가들의 신작시를 1편씩 모았다. 원로 신경림, 정희성, 이시영 시인부터 김병심, 안현미, 장이지, 박소란 등 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총 90명의 시인이 참여했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부당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왔던 전북 출신들의 시들이 함께 실렸다.
  정우영 시인(한국작가회의 전 사무총장)은 ‘폐광을 해체하라’에서 역사적 진실이 은폐된 참혹한 현장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남민시 동인으로 활동했던 박두규 시인은 ‘길가의 꽃들은 하나둘 피어나고’에서 ‘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의 숙명성과 비극성 속에서도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대비시켜 표현했다.
  90편의 시를 읽다 보면 4.3이 70년 전 과거가 아니라 여전한 현재임을, 지금 이 순간의 절통한 통증임을 느낄 수 있다. 4.3의 아픔으로 일그러진 시 속 낱낱의 얼굴들을 통해 역사적 상처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그 상처를 여기서 먼 어느 땅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의 것으로 넉넉이 보듬어안게 될 것이다.
  시집의 표제작이 된 ‘따뜻해질 때까지’를 쓴 이정록 시인은 “제주 4.3의 역사는 죽은 역사가 아니라고. 구멍 숭숭한 검은 돌에서 여전히 숨소리가 들리는 살아있는 역사이며 역사의 현재성을 이어가는 몫은 시인들 뿐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들의 손에 달려있다.”라고 말하며 “70주년 이후에도 4.3 항쟁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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