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중소기업의 위상이 높아졌다. 중소기업계의 숙원이었던 전담 기관의 부 승격도 마침내 성사됐다. 정부 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여망이 더 잘 반영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정책 스펙트럼 역시 매우 넓어졌다. 한국 중소기업 정책은  세계 최고수준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러나 아킬레스의 건 같은 약점 또한 없지 않으니, 정책 효과와 접근성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다. 마치 화려한 뷔페 차림을 앞에 둔 고객들이 음식의 맛과 질에 대해 불만의 소리를 수군대는 것처럼.
  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뷔페를 두고 불평을 할까? 짐작컨대 이유는 이렇다. 첫째, 음식은 많은데 젓가락 갈 곳이 없다, 즉 감동적인 요리가 없다는 투정이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흔해빠진 국수나 김밥으로 때우자니 화가 치민다. 둘째, 뭐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먹는 사람도 있다. 산더미 같은 음식 속에서 먹고 싶은 요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다. 
  첫 번째 문제를 정책의 평준화라 칭한다면, 두 번째 그것은  홍보 및 소통 부족이다. 이에 대처하고자 도처에 안내직원을 배치하지만 몰리는 고객 때문에 바쁜데다 전문성도 미흡해 정확한 서비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예산이 더 커지고 정책은 한층 다양해지지만, 오히려 기업들은 이용하기 더 어려워지고 정책효과는 의문에 빠진다. 정책과 고객이 숨바꼭질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헛되나마 꿈꾸어 보는 것이 바로 ‘보편적 특혜론’이다. 사전적으로 [보편적 :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특혜 : 특별한 혜택]으로 풀이되니, 이 조어는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특혜도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면 보편적일 수 있다는 발상을 근저에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고객에게 획일적 서비스 대신, 각자의 기대와 필요에 맞춰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이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병들면 먼저 가정의의 진료를 받은 뒤 증상에 따라 해당분야 전문의에게 가듯이, 정책도 그리 해보자는 것이다. 지금은 고객이 지원받길 원하는 시책의 창구를 찾아가야 한다. 자금, 인력, 마케팅, 기술 등 자신의 문제를 진단한 다음, 이를 취급하는 창구를 찾아간다. 첫 단추격인 문제 진단의 오류가 자칫 문제해결을 더디거나 어렵게 만들며, 복합적 문제의 경우 여기저기 헤매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필자가 상상하는 그림은 이렇다. 민원인은 순서를 기다려  창구의 컨설턴트를 만나, 환자가 가정의에게 하듯, 모든 것을 상담한다. 그 과정에서 기업의 당면 문제와 지원수요가 모두 도출된다. 결과는 시책 담당자들에게 통보되고, 기업의 상황과 필요에 부응한 종합적 처방이 이루어진다.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 출구가 여럿이다. 언뜻 특혜처럼 보이지만, 모든 기업들을 같은 방식으로 배려하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이러한 방식의 지원은 일부 은행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으며, 콜센터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것이다.  
  당연히 형평성, 자의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격기준과 한도의 무자비한 칼날로 침대 길이에 맞춰 행인의 발목을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식의 획일화된 지원은 이제 재고할 때가 됐다. 이 방안은 공직의 청렴과 신뢰, 창구의 전문성이 전제되어야 실현 가능하지만, 너나없이 4차 산업혁명을 외치는 지금, 한번은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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