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9년9월 벌어진 일리치 전투는 후백제의 명줄이 끊기는 장면이었다. 고려의 왕건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신검의 후백제군을 압박했다. 후백제로서도 존망이 걸린 전투라 비장한 각오로 대치했다. 하지만 고려군 선봉에 선 장수를 보고 후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바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었다. 장수들은 갑옷을 벗고 창을 내려놓은 뒤 속속 투항했고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신검은 잔병을 데리고 퇴각하다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900년에 세워진 후백제는 37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후백제가 그리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고려, 신라와 팽팽히 맞섰다. 이른바 후삼국 시대의 한 축이었다. 특히 927년에는 신라가 고려 편을 들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주까지 진격한 뒤 경애왕을 죽이고 새로이 경순왕을 올리는 등 기세등등했다. 또 급히 신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고려군을 공산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후백제가 힘을 잃기 시작한 때는 930년 고창성 전투였다. 고려군과 맞붙은 후백제군이 대패하는 바람에 힘의 균형추는 고려로 서서히 기울었다. 더욱이 왕위 계승을 둘러싼 후백제 왕실 내분은 결국 멸망을 재촉했다.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됐던 견훤은 은밀히 탈출해 고려에 귀순하고 말았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신검은 나름대로 나라의 틀을 정비하려 노력했지만 입은 상처가 너무 컸다.
  원래 후백제는 지금의 전남북과 충남 지역을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 견훤은 일개 호족 신분에서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뒤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틀을 갖춘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후삼국 패권 다툼에서 고려에 밀려 멸망이라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전주시가 이처럼 파란만장한 후백제의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복원한다고 한다. 시는 전주에 산재한 후백제 왕성 및 도성 등의 유적 발굴에 착수했다. 왕성으로 추정되는 물왕멀 일원과 도성으로 추정되는 동고산성, 남고산성 등이 그 대상이다. 또 아중리 인근 무릉고분군, 왜망실 와요지 터 등 지표조사를 통해 유물을 확인한 곳들도 본격 발굴할 예정이다. 시는 이에 대해 잊혀진 후백제사를 복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후백제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반도를 호령한 강국이었다. 그럼에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등 여러 사서들은 이를 폄훼하고 있다. 신라를 괴롭힌 데 대한 보복이라는 분석이다. 마침 전주시가 후백제 수도인 전주의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이 기회에 왜곡된 후백제사가 재조명 되고 제 위상을 회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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