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편에서 밝혔듯이 백제 부흥운동은 당나라와 신라군에게 주류성을 잃으면서 사실상 종식된다. 부안 상서의 주류성은 663년 9월 함락이전까지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었지만 잠시 다른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적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피성(避城)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백제부흥군이 662년 12월에 본거지를 피성으로 옮겼다가 두 달 뒤인 663년 2월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다. 피성은 약 60일간 부흥군의 수도였다.
당시 피성으로 가기 이전 부흥백제국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 옛 지역을 많이 회복했다. 한때 당이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포위하여 나당 연합군을 긴장시킬 정도였다. 어느 정도 영토를 회복하면서 자심감이 쌓인 백제부흥군 지도부는 험준한 주류성을 벗어나 평지로 이동을 꾀한다.
백제부흥군이 피성으로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주류성이 ‘산이 험준하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천험의 요새지만 농토에서 멀리 떨어진 척박한 토양으로서 전쟁이 길어지면 식량 수급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662년 12월 당시 피성으로 이전을 주장한 부여풍 등은 ‘‘피성은 서북쪽에 고련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남동쪽으로는 심니거언(深泥巨堰)이 막고 있어 방어하기에 좋다. 또 사방에 논이 있어 도랑이 파여 있고 비가 잘 내린다.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이 삼한중에 기장 풍요롭다. 의식의 근원이 천지에 감춰진 땅이다’며 이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왜군은 ‘피성은 적(당나라 군)이 있는 곳에서 하룻밤이면 갈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만약 뜻밖의 일이 있게 되면 위험하다. 굶주리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피성으로 이전했다.
하지만 백제부흥군은 다음해 2월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다. 신라가 거열성(경남 거창), 거물성(임실), 사평성(전남 장성) 등 요충지를 점령하며 좁혀 오자 결국 위험을 느낀 백제부흥군은 주류성으로 물러난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피성은 백제 백성들이 적의 공격을 피해 피난했던 성이라는 뜻으로 김제시를 가리킨다. <일본서기>등 기록에 따르면 현재 김제 성산(城山)공원 지역임이 거의 확정적이다.
성산은 김제시의 서쪽 교동에 위치한 김제의 주산으로 높이 42.0m의 낮은 산이다. 하지만 공원 정상에 설치돼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 100여리를 살펴볼 수 있다. 1917년에 편찬된 김제군지에는 성산공원은 백제시대로 추축되는 중요한 성곽으로 주성(主城)으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성산공원은 성산을 중심으로 국가사적지인 김제 관아와 향교, 용암서원과 벽성서원, 그리고 김제시청과 김제문화예술회관등이 위치하여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민들로부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다.
김제시청 문화홍보축제실 백덕규 학예연구사도 지난 2009년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김제의 성지 성산’이란 글에서 피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일본의 <일본서기> 천지기(天智記)에는 백제때의 김제가 피지산(避支山)과 피성(避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피성은 백제의 중앙정부가 궤멸된 이후 백제유민들이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벌였던 한 때의 근거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나당 연합군에 백제가 패망하고 백제의 충신이자 왕족인 복신이 왜국에 가 있던 부여풍 왕자를 모셔와 주류성(부안 우금산성 추정)에 항전하였으나 논과 밭이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는 메마른 자갈땅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662년 12월 백제의 왕 부여풍과 신좌평 복신등이, “주류성은 오직 전쟁을 막아낼 장소일 뿐”이라며 피성(김제성산)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지기’엔 또 김제로 천도해야 할 이유로 동남쪽에 깊고 커다란 제방이 지키고 있어 좋은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그 제방이 ‘벽골제’이다.
 이로 본다면 피성은 바로 ‘성산성지’이며 이것이 입증된다면 그동안 이설이 많았던 주류성의 위치 또한 부안 위금산성이 되는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압박으로 피성에서의 항쟁은 두 달 끝에 다시 주류성으로 물러났지만 백제부흥군이 우리지역 김제를 “삼한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고, “의식의 근원” 이라 높이 평가하며 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삼국시대의 우리지역 김제가 얼마나 그 위상이 높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같이 백제부흥군을 도운 일본의 <일본서기>에 자세히 언급된 피성이 문헌적으로는 김제 피성임이 거의 확실하지만 유적 유물에 의한 판단이 유보돼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김제시는 국비 8,000만 원을 확보해 지난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성산성의 역사를 밝히는 학술발굴조사를 실시했었다. 발굴조사는 서쪽 성벽 2개 지점에서 진행됐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 피성이 백제시대 토성이라는 결정적인 유물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최하층 판축토성의 영정주공의 간격이 매우 좁아 삼국시대 토성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발굴조사를 맡은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성산성은 세 차례에 걸쳐 축조된 토축산성이었다. 연구원은 결과서를 통해 “축조양상을 볼 때 성산성은 홍성 신금성, 천안 목천토성 등과 같이 나말여초에 주로 이용되었던 토성으로 ‘관(官)’자명 명문기와도 출토되어 국가의 중요한 시설로 이용됐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성산성 최하층에서 발견된 판축토성은 관련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아 명확한 축조시기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판축양상이 매우 치밀하고 영정주공의 간격이 130㎝ 내외인 특징이 있다. 영정주공의 간격은 나말여초기 토성의 경우 270㎝~800㎝ 내외, 또는 380㎝~400㎝인 반면 삼국시대 토성은 그 간격이 대체로 300㎝ 이내로 알려져 있다”며 “따라서 성산의 판축토성은 향후 추가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명확한 축성연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백덕규 학예연구사는 “백제사의 끝은 사비성이 무너진 660년이 아니라 백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린 663년으로 봐야한다는 관점에서 주류성과 피성이 지닌 의미가 매우 크다”며 “최근 주류성과 피성의 위치가 부안과 김제로 힘이 실리고 있어 유물을 통해 확인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김제의 백제시대 유적의 가치를 제고하는 사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구데기의 전설과 홍심정 활터
 어느 마을에나 전설은 있기 마련이다. 전설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되거나 기괴한 이야기로 변하게 된다. 특히 생활용수나 농업용수를 얻기 위해 강이나 저수지 근처에 형성된 마을에서는 물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로 인해 저수지와 강가에는 귀신이나 용 등의 비현실적 존재가 등장하는 전설들이 생겨났다. 우리지역 김제에 있어서는 벽골제의 전설과 성산공원의 독구데기 전설이 그러하다.
 지금의 성산공원 옆의 홍심정 활터는 예전엔 독구데기라 불리우던 저수리자 있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바로 옛 김제관아가 위치했던 곳이어서 김제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옛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독구데기는 밝은 낮 동안엔 활기가 넘치고 전망 좋은 저수지였지만 밤에는 그야말로 으스스한 공포의 장소였을 것이다.
 암흑속의 저수지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생물들의 소리는 변을 당했다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 더더욱 두려움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한 공포감이 만들어낸 옛 이야기는 이제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든 김제 시민들에겐 이제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추억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백덕규 학예연구사>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