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년) 나라 안팎은 온통 격랑에 휩싸여 있었다. 안으로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칵 뒤집혔고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등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정점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 그해 5월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민군 지도부는 일본과 청나라가 군사개입을 하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른바 전주화약이다. 조건은 정부가 개혁정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안질서와 지방행정이 거의 무너진 상황서 개혁은 더뎠다. 결국 농민군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집강소다. 농민군이 호남지방 각 군현 53곳에 설치한 집강소는 농민 자치기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은 적극 농민군에 협조했고 집강소는 사실상 행정권을 접수 하고 전라도 지방을 통치했다.

집강소를 설치한 농민군 측은 즉시 폐정 개혁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신분제를 철폐하는 것을 비롯해 백성을 수탈하거나 억압한 자들을 처단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개혁은 집강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나주나 남원 등지에서 일부 반발이 있었으나 곧 무력으로 해결했다. 이런 분위기는 충청도와 경상도 등지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당시 전국의 절반가량이 이 같은 자치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공주 우금치에서 50회가 넘는 전투 끝에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다. 당연히 집강소 체제는 무너졌다.

김제 원평에 남아 있는 집강소 건물이 전북도 기념물 137호로 지정됐다. 1882년 지어진 이 건물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로 쓰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면사무소로 다시 해방 후에는 개인 주택으로 활용되다가 얼마 전 붕괴 위기를 맞아 정부 지원으로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됐다. 이 장소에서는 김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주도로 다양한 문화행사가 벌어져 역사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제시는 현존 집강소의 문화재 지정은 전국 최초 사례라며 체계적인 보존과 활용을 약속했다.

흔히 집강소를 ‘아시아 민주주의의 뿌리’라고 평가한다. 집강소는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농민의 자치기구였다. 더욱이 집강소는 오늘날 지방의회처럼 의결기관으로서 의사원을 두어 의견을 듣는 등 민주적인 통치를 했다. 이번 문화재 지정은 이 같은 집강소의 의의를 다시 확인케 하는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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