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임에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지역, 바로 익산이다.
  백제 후기인 웅진 및 사비시대(475~660) 도읍과 관련된 8개 유산으로 이뤄진 백제역사유적지구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도 여기에 포함됐다.
  충남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정,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백제사를 새로 쓸 수 있는 익산의 백제 유적들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도의 비밀을 품은 왕궁리 유적의 발생부터 특징, 학술적 논쟁까지 살펴본다. 

▲ 시작은
 30대왕 무왕(600~641) 때다. 무왕은 재위 기간,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들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다.
  1400여 년 전에는 익산에 왕궁을 조영했고 이를 보여주는 게 사적 제408호인 왕궁리의 궁성 유적이다. 때문에 왕궁리 유적은 인접한 미륵사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힌다.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왕궁리 5층 석탑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이뤄졌으며 1965년 북쪽으로 기울어있던 5층 석탑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해체보수작업을 하던 중 일괄유물이 발견, 국보 제123호로 지정됐다.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8231;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백제 왕궁터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 위치한 금당건물터 조사가 이뤄졌다. 비슷한 시기 <관세음웅험기의 연구>가 발표되면서 백제 무왕이 천도한 왕궁으로 주목받게 됐고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본격적인 조사는 미륵사지 조사가 마무리돼가던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시작,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연차발굴을 실시해 왔는데 발굴조사는 2013년 궁장과 내부조사를 완료했고 고대 궁성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과 면모를 확인했다.
  2014년부터 익산 왕경 실체 규명을 위한 궁성외곽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며 성과를 토대로 궁성에 대한 융복합적 연구 및 복원정비를 추진할 예정이다.
 
▲ 왕궁리 유적은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곳은 궁성과 사찰 유적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돼 일정 기간 사용 후 왕궁의 중요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으로 확인됐다.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된 유적으로 처음부터 왕궁조성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됐음을 알 수 있다. 1:1 또는 2:1의 비례로 공간분할을 한 데서 알 수 있다.
  왕궁 남측 절반은 의례와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동서방향 4개 석축으로 공간을 나눠 배치됐다. 북측 절반은 휴식을 위한 정원과 후원, 필요한 금, 동, 유리를 직접 생산하던 공방터, 현재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최고의 화장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후 사찰로 변화하는데 정전 건물은 철거하고 편평하게 고른 후 탑과 금당, 강당 승방을 조성했다. 왕궁과 사찰의 중심축이 일치하며 사찰 건물 주변 회랑이 확인되지 않고 왕궁 담장을 계속 사용하는 거로 보아 특별한 용도의 사찰로 보고 있다.  
  원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무왕 사후 익산쌍릉에 모심에 따라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했을 거라 추정된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국보 제289호 왕궁리 5층 석탑은 사찰로 바뀌는 중에 처음부터 조성됐는지 아니면 목탑 후 재정된 건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하는 시기는 대체로 백제 말기로 보고 있으나 석탑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 익산 천도 관련 가설들
익산 관련 문헌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당시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발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왕도설을 비롯한 별부설, 배후설, 재천도설, 이궁설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고 됐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왕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같은 문헌에서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언급한 걸 근거 삼는다.
  앞서 언급했듯 왕궁성과 사찰, 방어시설들이 발견됐음에도 익산천도 관련해 망설여지는 지점은 나성을 비롯한 왕궁성 배후산성, 도로망, 관리들의 주거시설 같은 관련 시설이 아직 확인되지 않아서다. 
  수도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성된 별부였다는 ‘별도설’, 무왕의 모후세력 근거지라는 ‘배후설’, 630년 이전 익산으로 천도했다 이후 다시 천도했다는 ‘재천도설’, 왕궁성이 6세기 중&#8231;후대 이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는 ‘이궁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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