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동 3가 28번지. 어머니는 이곳에서 전세 팔백에 월세를 내면서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주인집 여자는 월세 받는 날이 되면 어김없이 검정색 세단을 타고 반드시 식당 뒷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나가곤 했다. 왜 정문으로 오시지 않고 불편하게 쪽문으로 오시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허름한 음식점에 드나드는 걸 누가 볼까 봐 그런다.”고 주인집 여자가 말했다.
―하미숙, 「경원동 3가 28번지」에서

  전북작가회의(회장 김병용)가 산문집 <내 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모악)을 냈다.
  서른아홉 명의 시인과 작가들이 각자의 삶에서 잊히지 않는 특별한 기억을 성긴 언어로 붙잡아 놓은 책이다. 모든 작품은 전라북도에서의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상의 끝에 서다」, 「국수 한 그릇의 추억」, 「오늘은 재미 좀 봤나비?」 등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장소에 대한 추억’, ‘사람과의 인연’, ‘사건에 얽힌 사연’을 소재로 한다.
  시인과 작가들이 풀어낸 소중한 기억 속에는 유년 시절의 총명하고 순순했던 날들도 있고, 열병에 시달리고 좌절과 깊은 절망으로 납작 엎드렸던 청춘의 한 시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삶의 큰 깨달음을 준 인연들에 대한 고백도 있다. 아버지가 물려준 보물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따뜻했던 손길을 만날 수도 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전라북도라는 특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마치 오늘 일처럼 되살아난다.
  수필가 김승종(전주대 교수)은 「삼천과 아버지」를 통해 청년 시절부터 전주천, 삼천, 구이 등에서 투망을 즐기던 아버지를 떠올렸고, 서연수 시인은 수필 「편지」에서 순창 메타세쿼이아가 쭉 뻗은 도로와 강천저수지부터 젖줄로 흐르는 작은 시내를 꺼내놓았다.
  장현우 시인은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로 귀촌했던 2008년 겨울을 떠올리면서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다.’고 기억했고, 채명룡 시인은 군산의 명물이었던 선창가 포장마차들을 떠올리며 ‘밤새 수맥 사람들과 시 나부랭이를 주절대던 해망동 13번 포장마차는 80년대를 관통하던 시대의 또 다른 작업실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신 문학평론가는 모악산을 보면 그 산기슭에서 살던 박남준 시인의 모악산방을 찾았던 1998년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불량배들처럼 삐딱하게 서 있는 삼겹살과 소주병들도 그 기억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성숙 방송작가는 계화도 수문, 김이흔 시인은 부안 청자박물관, 김자연 아동문학가는 전주 홍지서림, 도혜숙 시인은 전북대 엣 정문 골목, 박서진 아동문학가는 전주 경기전 은행나무, 박월선 아동문학가는 만경강, 서성자 아동문학가는 남원 섬진강변, 신재순 시인은 반딧불이가 살고 있는 무주 후도, 안도현 시인은 장수군 산서면, 이병초 시인은 황방산 틀못, 이소암 시인은 김제 청운사, 이영종 시인은 정읍 내장산, 조석구 시인은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난평마을, 차선우 소설가는 진안 죽도, 최기우 극작가는 기억 속 그곳으로 전주 산성마을을 꺼내놓았다.

삽화는 고형숙 작가가 그렸다. 2001년 첫번째 개인전 이후 7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수묵위주의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생활 속 공간과 일상의 풍경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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