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독립운동으로 기억되는 삼월이다. 올해 삼월은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사건이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것 같다. 한국사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시민혁명 1단계가 성공한 것이다. 앞으로 국민이 원하는 헌법개정과 개혁작업을 완성하여 적폐와 구체제를 청산하고 정의로운 새나라를 출범시킨다면, 세계사의 가장 아름다운 촛불 명예시민혁명 사례로 기록되리라. 탄핵정국 소용돌이 속에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이른바 친박시위대 한 무리가 행주치마의병대라고 자처하며 태극기를 두르고 나선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역사왜곡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개인으로서는 미약하기만한 시민들이 정의에 의지하여 뭉친 힘으로써, 그 강고한 절대권력인 현직대통령을 파면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3월16일 우리 고장 전북 고창에서 자랑스러운 “임진왜란 행주대첩 순국비” 제막식이 있었다.
  행주치마는 민관군단결, 국민통합으로 이룬 승전사례로서 자랑스런 한국사의 한 장면인 행주대첩의 상징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해상전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흔히 임진전쟁 3대첩으로 꼽힌다. 멸망직전의 나라를 건진 임진전쟁 3대첩의 주력부대원은 대부분 전라도 장병들이었다. 이순신이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평가가 바로 이것이다. 임진전쟁 때인 1593년 2월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임진전쟁의 양상을 바꾼 전투가 행주대첩이다. 이에 앞서 광주목사 권율은 전쟁초기 1597년 7월 전라도 완주와 금산의 경계인 배치고개(梨峙)전투에서 대승하여 곡창인 전라도를 지켰고,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빈약한 정규군에 의병, 승병 등 민관군이 일치단결하여 10배가 넘는 3만여 적군을 이긴 승전이다. 승리의 요인은 지도자 권율과 민관군의 일치단결, 화차와 신기전 등 신무기의 적용, '재주머니 던지기'나 투석전 같은 온갖 게릴라전, 육탄전술 등이다. 부녀자들까지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투석전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쟁은 무기와 병력보다도 국민통합의 정신력과 지도자의 도덕성, 전술전략이 우선한다는 전쟁사의 교훈이다. 행동하는 양심적인 시민들이 정의의 촛불로써 불의한 절대권력을 이긴 것도 비슷한 교훈이다.
  행주대첩 총사령관 권율장군의 선봉장으로 전라도 고창출신 청도김씨 14세 김응룡(金應龍)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응룡은 임진전쟁유공자로 1605년(선조 3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행주치마 전술의 창안자로 전해오는 김응룡은 임진전쟁이 일어났으나 조정이 제대로 대처를 못하자 고창에서 떨쳐 일어났다. 동생 김응구(金應龜)와 재종제 김몽룡(金夢龍), 사위 김진(金璡) 등 가솔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군량미로 120석을 내놓고 뱃길로 전쟁 물자를 수송하여 병참을 도왔고, 무장현 동백정포(현재 고창군 동호해수욕장이 있는 동호항)와 한양을 오가며 공을 세웠다. 이후 행주대첩에 참전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이때 동생 김응구 역시 형의 원수를 갚겠다며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후손들과 지역유림들은 김응룡, 김응구 두 충신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감모재(感慕齋)를 지어 후학양성과 충효쌍전의 정신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왔다. 감모재는 훗날 청도김씨 집안서원이었으나 훼철된 청도의 남계서원과 고창 청도김씨의 터전인 상하면 검산리의 지명을 따서 계산서원(溪山書院)으로 거듭났다. 감모재에 있던 스무재 서당은 전라도 각지에서 모여들어 공부하던 서당으로 이름을 날렸고, 방랑시인 김삿갓이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김삿갓의 스무재 서당 풍자시도 전해진다. 이 자랑스런 계산서원 마당에 청도김씨 김응룡 형제의 임진왜란 행주대첩 순국비를 행주대첩 424년만에 세운 것이다. 늦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행주치마에는 자랑스런 민족사의 한 장면을 가슴으로 기억하려는 선조들의 염원과 슬기가 담겨있다. 유능한 정부도 없었고 병력과 무기는 절대열세였지만, 구국충절의 의병정신, 지도자의 지도력이 의병들의 정신력과 결합하여 기적같은 대승을 거뒀다. 이 쾌거를 하나의 상징으로 압축한 것이 행주치마다. 온갖 이유를 찾아내서 행주치마와 행주대첩은 상관이 없다고 일일이 논증하는 일은 그래서 다 부질없다. 역사는 뜻으로 새겨 읽어야 하고, 한국사는 한국인의 가슴으로 안아야 한다. 친박시위대가 행주치마의병대라 포장하는 일은 장난으로라도 절대 해서는 아니 된다. 행주대첩 순절의병 후손들께 크게 죄짓는 일이다. 혹시라도 반민족행위자가 애국자로 변신한 현대사의 불행한 한 장면처럼 행주대첩을 왜곡하는 실마리가 될까 심히 두렵다. 그러기에 현대판 역사의 기록인 사초를 매일 생산하는 언론들의 사실인식과 어휘선택은 신중해야만 한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