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 (중략)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을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굶어죽은 시체가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 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구절이다.
  다산이 나고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조 후기로 접어드는 시기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이 기간 조선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영·정조 때 문예부흥기라고는 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기는 다른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산은 천주교 연루 때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그런 실상을 낱낱이 보고 이렇게 적은 것이다.
  사실 다산의 다재다능함은 애민사상 못지않은 탁월한 바가 있었다. 그는 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학자였다. 그는 그동안 조선조를 지배한 성리학이 시대사상으로서 제 역할을 못한다고 보고 이익의 학문에 기반을 둔 실학사상을 폈다. 실학은 기술문명과 부국강병에 관심을 갖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보다 실용적인 방향을 추구했다. 또 다산은 과학기술자이기도 했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가 하면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건설을 주도했다. 심지어는 기중기와 같은 기계를 고안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방대한 저술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평생 그가 쓴 책은 무려 500여권. 그 가운데는 앞서 소개한 목민심서 외에도 경세유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유명한 책들이 허다하다. 더욱이 이 저술들 가운데 대부분은 절망과 실의의 나날이던 유배 생활 때 집필한 것들이어서 이채를 띤다.
  요즘 SNS에서는 다산이 쓴 조선시대 영어학습교재 ‘아학편’이 화제라고 한다. 이 책은 한자와 함께 로마자 알파벳과 영어 단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예컨대 나물 채와 푸성귀 소 항목에서 vegetable이라고 영어로 쓴 뒤 ‘뻬쥐타블’이라고 한글로 발음을 적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오늘날 영어 발음에 놀랍게 가깝다는 평가다. 쉽게 말해 책에 적힌 발음이 오늘날 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다산에 대해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며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 추사 김정희도 “그의 학문 세계가 하도 넓고 깊어 감히 그 세계를 논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학편을 대하는 느낌이 바로 그렇다. 시대를 앞서 간 한 거인을 마주 대하는 것 같은 경외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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